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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미강의 생각의 숲]저항과 변절의 도구

권미강 프리랜서 작가
권미강 프리랜서 작가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다. 조국 독립을 위해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던 3·1운동이 우리 역사에서 소중한 이유는 누군가의 주도가 아닌, 온 국민이 함께한 시민혁명이었기 때문이다.

'서시' '별 헤는 밤' 등 주옥같은 시를 쓴 윤동주 시인은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인 1917년 12월 30일 태어나 해방 직전인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사했다. 한 번도 해방공간에서 살아보지 못한 시인은 그러나 누구보다도 깊은 민족애와 독립에 대한 여망을 가지고 짧은 생을 살았다.

그가 스물아홉의 생에서 가장 치욕스럽게 생각했던 일은 '창씨개명'이었다. 일본 유학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했던 이름 '히라누마 도오쥬.' 그는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시 '참회록'에 담아냈다.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잡혀 형무소에서 실험용 주사를 맞고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그의 시는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으며 '윤동주를 사랑하는 모임'까지 생겨났다. 비록 짧은 생이었지만 시로써 억겁의 생명을 얻은 것이다.

윤동주 시인과 같이 일제강점기를 지내온 작가 중에는 일본을 찬양하고 황국국민으로서 충성할 것을 강요하는 작가들이 있다. 이광수, 최남선, 김동인, 서정주, 노천명, 모윤숙 등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표한 친일 문인만 42명이다. 그들이 썼던 글을 보면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천황을 위해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내놓으라거나, 일본 군인들을 위해 몸을 바치라며 일제에 대한 복종을 강요했다. 그들에게 조국은 일본이었던 것이다.

작가에게 저항과 변절의 도구는 글이다. 민족을 배반하고 젊은이들에게 끔찍한 전장에 나가 목숨을 바치도록 글을 쓴 친일 문인들. 철저한 변절자인 그들은 일본 패망 후에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작가로서 많은 걸 누리며 살았다. 창씨개명으로 부끄러워하며 참회했던 윤동주 시인이 더욱 빛나는 이유다.

권미강 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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