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심윤경이 '나의 아름다운 정원'이래 17년 만에 펴낸 성장소설이다. 소설 '설이' 도입부는 보육원, 가난, 입양 같은 오래된 키워드들로 가득하다. 복고풍이라고 하더라도 너무 멀리 간 거 아닌가 싶은 느낌이 들 정도다.
눈 내리는 새해 첫날 아침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발견돼 풀잎보육원에서 자라고, 세 번의 입양과 세 번의 파양을 겪은 끝에 함묵증을 앓게 된 열두 살 소녀 설이가 주인공이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평생 한 가지도 일어나기도 힘든 일들이 한 아이에게 겹치니 첫 느낌은 다소 부담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소아과병원에서 설이는 독자가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은 문제를 끄집어 내 독자의 머리를 강타한다.
'소아과 대기실은 언제나 껄끄러운 파장으로 나를 뚫고 지나갔다. 칭얼거리는 아이, 무심하게 아이에게 휴대폰을 쥐여주는 엄마. 그들은 지금 뜨겁게 사랑하고 있을까? 지친 얼굴로 시선을 TV에 걸쳐둔 젊은 여자의 가슴속에는 지금 엄마의 사랑이란 것이 끓어오르고 있는 것일까?' -작품 중에서-
부모가 자식을 뜨겁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작가는 지금, 부모가 자식에게 단 한순간이라도 사랑 외에 다른 마음을 품을 수도 있다고 의심하는 건가?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독자인) 나는 24시간 불타는 국밥집의 장작 아궁이처럼 1년 365일 아들을 향한 사랑을 불태웠다. 아이에게 화를 낸 순간에도 화났음을 알려야 할 훈육차원의 필요 때문이지 진심으로 화가 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심윤경은 설이를 독자 눈앞으로 데려와 "안 그럴 수 있다고, 안 그런 부모도 있다고, 안 그런 순간이 있다"고 고함을 질러댄다. 그제서야 나는 심윤경이라는 영리한 작가가 설이라는 주인공을 보육원 출신에 유기아동으로 설정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설이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대한 지식과 감정을 원점으로 돌리고 생각지 못했던 기묘한 각도에서 집요하고도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아마도 버려졌으므로 설이는 평범한 우리는 모르거나, 알더라도 꺼내기 힘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이리라.
훌륭한 교육만이 살 길이라고 믿는 보육원 원장의 열성으로 설이는 유명 사립초등학교로 전학한다. 식당일을 하는 위탁모와 함께 임대아파트에 사는 설이가 재벌 회장의 손자와 연예인 자녀가 다닌다는 그 학교에서 극심한 이질감을 느낄 것은 자연스럽다. 사라지는 물건들, 조롱하는 질문들, 침묵하는 방관자들. 설이는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지만, 비열한 아이들은 악취를 풍기며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꺼내지는 설이의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돌려 설이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격을 가한다.
고전적인 학교폭력 이야기인가 싶던 소설은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방향으로 크게 굽이쳐 흐른다. 설이가 가장 존경하고 동경하던 소아과 의사인 곽은태 선생이 위탁부모가 되어 설이를 양육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설이가 가졌던 '최고의 부모'에 대한 막연한 환상은 낱낱이 깨지고, 그들의 위선적인 양육방식과 비열함을 목격하고 실망한다. 설이에게 추궁당하는 '곽은태 선생'의 모습은 대외적으로는 진보적 가치와 개방성을 역설하며 막상 내 자식에겐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직업 가져라'는 속물적 바람을 내비치는 양심 있는 지식인을 자처하는 이 나라 중산층의 이중적인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작가 심윤경은 "이 아이는 너무나 나를 닮았다. 나도 몰랐던, 어쩌면 내가 인정하지 않았던 나를 너무나 닮았다. 설이가 가진 아픔,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상징되는, 내 인생에 제발 그것만 아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깊은 고통의 근원이 나 자신에게도 분명히 있으니까."라고 말한다. 심 작가는 "설이는 내가 만든 소설 속 인물인데, 내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 제 맘대로 원고지 위를 헤집고 다니는가싶더니 급기야 내 폐부를 찔러대고 있다"고 고백한다.
한때 흔들림 없는 부모의 어깨를 동경했지만 알고 보니 세상에 흔들리지 않는 어깨는 없더라는 설이의 깨달음은 부끄러움과 해방감을 동시에 안겨준다. 나 자신 부족함 많은 아버지이고 내 삶 전체가 이 나간 사발처럼 흠집투성이지만, 그런 불완전함을 디디고 두발로 서는 것이 인간이고, 그 과정이 인생이니 말이다.
소설 '설이'는 아이의 입을 빌어 사랑의 본질과 삶의 불완전함에 대해 질문한다. 이 작품을 성장소설 장르에 가둘 수 없는 이유다. 세상을 알만큼 안다고, 웬만한 일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도 설이를 만나면 울고 말 것이다. 설이에게서 꽁꽁 숨겨놓았던 나를 발견할 테니. 슬프지만 아름다운 소설이다.
278쪽, 1만3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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