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일제의 강압적 침략에 맞선 조선의 민중들은 독립과 민족자존을 위해 평화적 시위를 단행했고 대구에도 3·1운동의 물결은 밀려왔다.
대구 3·1운동은 사실(史實)에 의하면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에 모인 군중들로부터 시작됐다. 그들은 청라언덕을 넘어 대구시 중심부로 나아가며 "대한독립 만세"를 목 놓아 외쳤다.
그러나 3월 8일 본격적인 대구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대구가톨릭대학교 전신인 성유스티노신학교 학생들이 먼저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 같은 근거는 천주교대교구 초대 교구장이었던 드망즈 주교의 일기에 의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100년 전 이맘 때 무슨 일이…
1918년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발표된 후 일제강점기 아래 있던 조선 민중들의 독립 열망은 높아만 갔다. 그러던 것이 이듬해 2월 1일 만주에서 '무오독립선언서'가 발표되고 잇따라 2월 8일엔 일본 도쿄서 재일유학생들이 주축이 된 '2·8독립선언서'가 낭독되면서 그 촉발로 인해 급기야 3월 1일 조선 전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곧이어 그해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수립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의 기치는 2일 개성과 서울 경기도 일원, 3일 충청도 괴산, 4일 전라북도, 8일 경북과 대구, 10일 강원도와 전라남도, 11일 경상남도 등으로 동심원처럼 퍼져나갔다. 이어 30일 의주, 31일 천안 등 거의 한 달 넘게 이어졌다.
◆성유스티노신학교 학생들과 3'1운동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대구서는 성유스티노신학교 학생들이 발 빠르게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당시 해성학교의 김하정 교사와 신학교 홍순일 교사가 있었다. 김하정 교사는 3·1운동 경상북도 조직부장을 맡고 있었고 홍순일 교사는 성유스티노신학교에서 사회단체와의 연락을 맡고 있었다.
이들 외 신학생으로는 김하정의 동생 김구정과 서정도가 주동이 돼 만세시위 대열 합류를 준비했다. 김구정은 독립선언문 복사와 유인물 프린트를, 서정도는 태극기 수기 제작 책임을 분담했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기로 결의했다.
이런 사실은 그러나 드망즈 주교와 샤르즈뵈프 교장신부에게 곧 알려졌고, 교장신부는 "너희들이 왜 이러느냐, 나라가 독립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너희들의 소명은 따로 있다. 그것은 독립되는 너희 조국 동포들의 영혼을 구하는 일이다"면서 신학생들에게 만세운동 참여를 만류했다.
김태형(신부) 영남교회사연구소 소장은 "대구 만세운동은 1919년 4월 21일까지 40여 일 간에 걸쳐 일어났다"면서 "성유스티노신학교 학생들도 당시 주교와 교장신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4월 3일 다시 만세운동에 참여하고자 했던 일이 있을 만큼 독립에 대한 염원이 컸던 것으로 사료에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드망즈 주교는 신학교의 방학을 앞당기는 조치로 조국 독립에 대한 열의를 막았다.
◆천주교는 3·1운동에 미온적?
당시 드망즈 주교가 속한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는 정교분리를 내세우고 있었다. 특히 조선의 경우 100여년의 박해 뒤에 얻은 종교적 자유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민족운동인 3·1운동을 정치적 문제로 해석했고 신자들에게도 정치 문제에 관여하지 않도록 가르쳤다.
게다가 조선을 강제 병합한 일제 총독부는 1915년 8월 총독부령 제83호로 '총독부의 허가없이는 포교활동을 못하며 포교지의 신설도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점을 골자로 한 포교규칙을 제정, 공포함으로써 모든 종교 활동에 대한 탄압도 본격화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20세기 초는 조선에서의 박해가 막 끝난 교안(敎案'정부와 신자들의 충돌의 중재)의 시기여서 더더욱 천주교에 대한 일제의 박해가 재발될까 우려했던 것이 당시 천주교 지도자들의 보편적 생각이었다. 덧붙여 기미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에 천주교 인물은 없었다는 사실도 한국교회가 항일운동에 소극적이었다는 평가에 한몫을 하고 있다.
김정숙 영남대 사학과 교수는 이에 대해 "1910년대 우리나라 천주교 신자들의 숫자는 불교와 개신교 신도보다 훨씬 적었다"면서 "그때 당시 일제의 산림조사령과 연초 재배 금지 및 교회 압박으로 인해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사는 촌락이 더욱 깊은 산림 속으로 밀려나는 등 시대적인 상황이 민족적 물결에 동참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제는 제대로 조명해야 할 때
성유스티노신학교 신학생들의 3·1운동 참가는 천주교대구대교구 100년사인 '은총과 사랑의 자취'(2012년 발간)와 김정우 대구가톨릭대 총장이 대구관구 대신학원장 시절 펴낸 '성유스티노신학교 1914~1945'(2013년 출간)에 드망즈 주교의 일기를 바탕으로 '3·1운동과 성유스티노 신학생들'이란 항목으로 정리돼 있다.
대구가톨릭대 영남교회사연구소는 이를 근거로 3·1운동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을 마련, 일제 치하에서 대구대교구가 지역사회와 교회 안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재조명할 예정이다.
최경진 대구가톨릭대 홍보실장은 "드망즈 초대 교구장의 일기에 따르면 1919년 3월 5일까지 성유스티노신학교 신학생들의 만세운동은 교정 안으로 엄격히 제한했던 것으로 안다"면서 "어쨌든 3·1운동과 관련해 현재 대구가톨릭대의 전신인 성유스티노신학교의 소중한 역사적 콘텐츠임에는 틀림없고 이를 기념할 필요는 충분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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