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마그리트, '골콩드', 81x100cm, 캔버스 위 유채, 1953, 더 매닐 컬랙션(휴스턴)
지난주 초, 비가 내리고 싹이 튼다는 절기인 우수에 맞춰 비가 조금 내렸다. 겨울 가뭄을 해갈할 정도는 아니지만 촉촉이 내린 비는 봄을 재촉하는 전령임에는 틀림이 없다. 만약 봄비 대신 하늘에서 양복에 중산모를 쓴 멋진 신사들이 비처럼 내려온다면? 하나도 아니고 멋쟁이들이 우르르 비처럼 쏟아져 내린다니! 상상만으로도 애인이 없는 여성들을 설레게 할 것 같다.
'It's raining man'이란 곡에서는 '꿈에서 단 하루만이라도 내 운명의 남자를 만나고 싶어. 하늘에서 남자들이 비처럼 쏟아진다면'이라는 가사가 흘러나온다. 1979년에 작곡된 이 곡은 먼저 다이애나 로스, 도나 서머 등 내로라하는 여가수들이 불렀고, 1982년 여성 그룹 '더 웨더 걸스'에 의해 전 세계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쳤다.
벨기에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1898~1963)의 '골콩드'는 이 노래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1953년에 발표된 이 그림에서 신사들은 노래처럼 신나는 분위기를 연출하지는 않는다. 하나같이 머리부터 발까지 검은색으로 차려입고 한쪽 팔에 납작한 서류가방을 든 남자들은 몰개성적이고 경직되어 있다. 정면, 측면과 후면 각도로 반복적, 대칭적으로 배열이 된 남자들은 역시 기하학적으로 딱딱하게 구성된 붉은 지붕의 베이지색 건물을 배경으로 비처럼 내려오고 있다. 수직으로 하강하는 자세로 공중에 부양된 상태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오른쪽 건물의 각도처럼 인물들도 원근법을 적용해 점점이 그림 안쪽으로 향하고 있어서 맨 뒤의 남자들은 작고 흐릿하게 실루엣만 보인다.
마그리트는 이 그림에서 각각의 개인은 하나의 그룹에 완벽하게 흡수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얼핏 보면 남자들은 모두 똑같은 검은 코트, 모자를 쓴 채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각 인물은 유일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남의 이목을 끌지 않는 조용한 삶을 추구했던 마그리트의 특성은 그림 속 중산모를 쓴 남자의 익명성에 반영되어 있다.
마그리트는 초현실주의 작가 중 가장 역설적인 삶의 태도를 보였다. 달리처럼 괴짜 행동으로 스캔들을 만들지도 않았고, 특히 초현실주의자들과 교류하던 프랑스 파리를 떠나 1930년 벨기에 브뤼셀로 돌아간 이후에는 평범하고 평온한 삶을 살았다. 따로 작업실을 마련하지 않고 집의 부엌이나 식당에서 그림을 그려서 밖에서 보기엔 작업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외부 세계를 인식하고 있었고 기발한 상상력으로 일을 꾸미기를 좋아했다.
양복 재단사이자 사업가인 아버지와 모자 디자이너인 어머니의 영향인지 모자와 양복을 차려입은 신사들이 마그리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실제로 중산모를 즐겨 썼던 마그리트에게 그림 속 중산모를 쓴 남자는 작가의 페르소나인 듯하다.
또한 중산모를 쓴 남자들이 풍기는 고독감은 마그리트의 삶에서도 떠나지 않았다. 그가 14세 되던 해, 사업 실패로 빚쟁이들에게 쫓기던 어머니가 집 근방 상브르 강에 투신했다. 17일 후 가족이 시신을 찾았을 때 잠옷이 온통 얼굴을 뒤덮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스스로 택한 죽음을 보지 않으려 한 것인지, 물살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 극적인 사건은 그에게 각인이 되었지만 그는 평생 자신을 지배하던 우울증을 삶과 작업에서 형이상학적으로 활용했고, 미술가라는 이름을 거부하면서 자신을 회화를 통해 사고를 교류하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작품 제목 '골콩드'는 과거 다이아몬드 광산으로 유명했던 인도의 도시로, 폐광이 돼 유령도시가 되었지만 여전히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에겐 '엘도라도'처럼 전설로 남은 곳이다. 마그리트는 '골콩드'란 제목에 대해서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고 "그림 제목은 설명이 되지 않고, 그림은 제목을 풀이하는 삽화가 아니다"라고만 말했다. 그의 작품에서는 특정한 대상들을 상식적인 맥락에서 떼어내 이질적인 상황에 배치함으로써 기이하고 낯선 장면을 연출하는 전치(dépaysement) 기법이 자주 보인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색다른 시각으로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한 탓에 창의성과 상상력이 화두인 요즘에도 마그리트의 작품은 각광 받고 있다.
박소영(전시기획자, PK Art & Media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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