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8일 오후 2시쯤 대구 서문밖시장. 전날 내린 비를 무색케 하듯 화창하게 갠 토요일이었다. '큰 장'으로 불리던 서문밖시장은 여느 때처럼 인파로 북적였다. 인파 속에는 계성학교와 신명여학교, 대구고등보통학교에서 온 학생 수백 명이 섞여 있었다.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려 잡화상이나 아낙네로 변장한 채였다.
서문시장 소금집 앞 빈터(지금의 섬유회관 맞은편)에 집결한 인파는 어느새 1천여명에 달했다. 남성정교회(현 제일교회) 이만집 목사와 김태련 조사(助事)가 쌀가마니로 급조한 단상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던 중 미처 끝나기도 전에 김 조사가 경찰에 끌려나갔고 이 목사가 급히 웅성이는 군중을 향해 소리쳤다. "대한독립 만세!"
시장에 모인 학생과 군중들은 이끌리듯 양팔을 치켜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한 만세운동의 외침이 마침내 대구에 닿은 순간이었다.
흰옷을 입은 참가자들은 청라언덕 소나무 숲길(현 3·1만세운동길)을 지나 제일교회와 계산성당을 거쳐 대구경찰서(현 대구 중부경찰서) 방향으로 구름처럼 몰려갔다. 학생과 서문밖시장 상인들, 제일교회와 계산성당 교인들, 보현사 스님들까지 대열에 합류했다. '민중의 만세운동'이었다.

일제는 강제진압에 돌입했다. 무장한 일본군 보병대와 기마헌병들은 옛 달성군청(현 대구백화점 인근) 앞에서 만세 행렬을 막아섰다.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의 가혹한 진압에 거리는 피로 물들었다. 시위대는 해산됐고, 157명이 체포됐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속 만세운동까지 총칼로 잠재울 수는 없었다. 이틀 뒤인 10일에는 김영서 등이 남문밖시장(현 염매시장)에서 다시 독립만세를 외쳤다. 30일에는 남문밖시장에서 동화사 지방학림들이, 4월 15일에는 수성면 대명동에서, 4월 26~28일에는 공산면 미대동에서도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이 기간 대구에서만 6차례에 걸쳐 2만3천400여명이 만세운동에 참가했고, 이 가운데 219명이 숨지고 916명이 다쳤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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