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종문의 한시산책] 강남의 여인[江南女(강남여)] 최치원

이종문 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이종문 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강남에선 풍속이 제멋대로라 江南蕩風俗(강남탕풍속)

딸아이를 기를 때도 그저 예쁘게 養女嬌且憐(양녀교차린)

허파에 바람 들어 바느질 대신 性冶恥針線(성야치침선)

화장을 끝내고는 악기나 타네 粧成調管絃(장성조관현)

배우는 게 우아한 음악 아니고 所學非雅音(소학비아음)

그게 다 남녀 간의 사랑 노래라 多被春心牽(다피춘심견)

제 생각엔 향기로운 꽃 같은 얼굴 自謂芳華色(자위방화색)

언제나 이팔청춘 누릴 줄 아네 長占艶陽年(장점염양년)

이웃집 저 처녀를 도로 비웃지 却笑隣舍女(각소린사녀)

아침 내내 베틀에서 베를 짜는데 終朝弄機杼(종조농기저)

베 짠다고 죽을 고생 다 한다 해도 機杼縱勞身(기저종로신)

비단옷은 네가 입지 못할 거라고 羅衣不到汝(라의부도여)

강남은 작자 최치원(崔致遠: 857-?)이 중국에서 활동할 때의 주 무대다. 작품에는 강남에 살고 있는 두 여인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포착되어 있다. 하나는 야한 화장을 하고 사랑타령에 빠져 지내는 취생몽사 형의 허파에 바람 든 처녀이다. 다른 하나는 노동의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오히려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설상가상 형의 가련한 처녀다. 따라서 이 작품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노래한 사회시의 범주에 포함된다. 북한에서 최치원을 사실주의적 사회시의 작가로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된다.

그런데 최치원은 왜 이런 시를 지었을까? 죽어라고 베를 짜도 비단옷을 입지 못하는 그 가련한 처녀의 삶이 몹시도 애달팠기 때문일 게다. 하지만 그것이 창작 동기의 전부일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다 알다시피 최치원은 황소 토벌군의 사령관이었던 고변의 막부에서, 호미 대신에 붓으로 경작하여 생계를 해결했던 문인이다. 그가 한 일은 고변을 대신하여 글을 짓는 것. 4년 동안 무려 만여 수의 글을 지었다고 하는데, 그게 거의 다 고변을 위한 대작이었다. 최치원의 이름을 온 천하에 떨치게 한 명문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도 물론 그렇다.

그러고 보면 최치원의 처지는 죽어라고 비단옷을 짜서 남 좋은 일을 시키는 강남 처녀와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위의 작품에서 정말 노래하고 싶었던 것은 베 짜는 처녀의 비애가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서 대작이나 하고 있는 자신의 비애가 아닐까 싶다. 그 옛날 우리나라 과부들이 어금니를 깨물면서 슬픔을 참다가, 남의 집 초상에 가서 꽁꽁 숨겨뒀던 자신의 슬픔을 대성통곡하며 터뜨렸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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