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빛나지 않는 곳에 여성독립운동가 있었다

정일선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
정일선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

1919년 3월 8일 '그날'이 밝았다. 장날이었고 토요일이었다. 서문 밖 큰장터는 여느 장날처럼 장을 보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어디선가 남녀 학생 수백 명이 삼삼오오 모여들더니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선언서를 뿌리며 '대한 독립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쳐댔다.

교사 임봉선의 주도로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신명학교 여학생 50여 명은 남학생 못지 않은 기개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군중들의 참여로 자연스럽게 대열이 갖춰지고, 달성군청으로 행진이 시작됐다. 100년 전 '그날'의 풍경이다.

3․1운동은 전 국민이 함께 독립의 의지를 모았던 기념비적인 민족독립운동이다. 하지만 여성에게는 또 다른 독립의 의미가 있다. 3․1운동을 경험하면서 당시 가부장제와 봉건적 잔재가 여전했던 조선 땅에서 젠더 지형이 서서히 바뀌는 계기가 된 것이다.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어머니로만 존재했던 문(門)안의 여성들이 애국에는 남녀가 다르지 않다는 근대적 시민의식, 주체적 여성 존재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각성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가장 낮은 계층이었던 기생 출신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현계옥은 독립운동가 현정건의 연인이었지만 자신을 한 여자로만 보지 말고 같은 동지로 생각해달라며 애국동지의 길을 걷게 된다. 3․1운동 이후 상하이로 건너가 의열단에 입단하고 본격적인 항일 무장투쟁의 길에 나선다. 정칠성 역시 3․1운동 이후 '기름에 젖은 쪽진머리 탁 베어 던지고' 단발을 감행한 채 일본유학을 떠나 여성운동가, 사회주의 운동가로 변모하게 된다.

국가보훈처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 333명을 포상한다고 밝혔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독립유공자는 1만5천513명이 되었다. 하지만 이 가운데 여성은 432명으로 2.8%에 불과하다. 더구나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여성은 임봉선, 이희경, 유인경, 차보석 그리고 이번에 대통령 표창에 추서된 남영실, 이남숙, 한연순 등 7명이 전부이다.

여성 독립운동가가 이렇게 적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공적 기록이나 이들의 행적을 밝혀줄 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탓이다. 지금은 조금 유연해졌지만 지난 정부까지만 해도 '징역 3개월 이상, 태형 90대 이상'이라는 기준이 적용돼 옥고를 치르지 않은 여성들은 유공자가 되기 더욱 어려웠다.

광복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수십 년을 이어왔던 지난한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수많은 이름 모를 여성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앞에서 언급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행적이 남아 있어 운 좋게도 세상에 알려진 사람들일 뿐이다.

"남성 독립운동가 뒤에는 여성 독립군이 있었다"는 말이 있다. 총칼을 들고 독립운동 전면에 나선 남성들 뒤에는 생계를 잇고 집안을 건사하며 독립자금을 마련한 여성들이 있었다. 이를 큰 일하는 남성을 보조하고 수발하는 역할로 한정해 내조라는 이름으로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스스로 문밖을 나섰던 여성들을 다시 문안으로 유폐시키는 일이다.

2019년 3월 1일 100주년의 날이 밝았다. 올해만큼은 빛나지 않는 곳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남성과 다른 방식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는 점을 꼭 기억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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