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여성들은 단지 남성의 보조적 역할이 아니었다. 독립운동 전면에 나서 무장투쟁을 전개하는가 하면, 여성운동 단체를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특히 현계옥과 정칠성은 독립사상을 전파한 대구 출신 '사상(思想)기생'으로 불렸다. 1919년 9월 일본 경찰의 치안책임자였던 지바료는 총독부에 올린 보고서에서 "조선의 기생들은 화류계 여자가 아닌 독립투사다"라고 쓰기도 했다.
현계옥과 정칠성의 흔적은 현재 대구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현계옥이 소속돼 있던 대구기생조합의 후신인 달성권번(券番·기생조합의 일본식 명칭), 정칠성이 창립했던 대구 최초의 독립적인 여성운동 단체 대구여자청년회의 창립총회 장소였던 대구명신학교 후신 복명초교 정도가 있을 뿐이다. 역사 연구 교사 단체인 '지역사체험연구회' 소속 김태훈 영남중 교사와 함께 이들의 발자취를 찾아 나섰다.

◆혁명가를 꿈꿨던 현계옥
뛰어난 용모와 춤. 가야금, 승마술에 뛰어났던 경북 달성 출신인 현계옥(1897~?)은 '말타는 기생'으로 풍류객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그의 인생은 '운수 좋은 날'로 유명한 대구 출신 소설가 현진건의 형이자 독립운동가였던 현정건(1887∼1932)을 만나며 뒤바뀐다.
현계옥은 19세 무렵 현정건을 만나기 위해 서울로 이사해 '한남권번'에 들어간다. 이듬해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려 일본 경찰을 눈을 피해 서울로 숨어든 현정건을 만난 현계옥은 그가 쉽사리 계획을 털어놓지 않자 "나를 애인으로 혹은 한 여자로만 보지 말고 동지로 생각해 달라"며 결연함을 보였다. 이후 현계옥은 현정건의 비밀결사대 독립운동자금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으며 본격적인 독립운동가의 길을 걷는다.
이후 달성권번으로 이름이 변경된 대구기생조합의 위치는 분명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다만 구 만경관 근처 한식집 '춘앵각' 인근(중구 상서동 20번지)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태훈 교사는 "현계옥은 항일무장투쟁의 최전선에 섰던 자랑스러운 대구 출신 여성 독립운동가"라고 강조했다.

현계옥의 독립운동 공적은 김원봉이 조직한 항일무장단체 의열단에서 빛을 발한다. 1919년 중국으로 간 현계옥은 길림에서 물심양면으로 단원들을 도왔지만, 의열단 가입은 쉽지 않았다. 기생이라는 출신 성분 탓이었다. 현계옥은 끈질긴 설득 작업을 벌여 이듬해 의열단에 가입했다.
의열단 단원으로서 현계옥의 활약은 여느 남성 단원 못지 않았다. 현계옥은 육혈포(탄알 구멍이 6개인 권총) 사격술은 뛰어난 데다 폭탄 제조에도 재능을 보였다. 이런 현계옥의 활약은 영화 '밀정'의 여성 독립운동가 연계순의 모습으로 재현됐다.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 정칠성
대구 출신 정칠성(1897~1958)은 근대 여성운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기록에 따르면 형편이 어려웠던 정칠성은 여덟살 무렵 대구 관찰사의 잔치를 구경한 뒤 스스로 기생의 길을 택했다. 군청과 도청 행사에 빠지지 않고 초청되는 등 유명세를 떨쳤던 그는 1915년까지 대구에서 기생 생활을 하다가 18세 무렵 상경해 한남권번에 등록했다.
3·1운동은 정칠성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그는 서울 한복판에서 시위의 시작과 진행을 생생히 지켜본 뒤 독립운동가의 삶을 택했다. 정칠성은 "흥분에 넘치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시위에 참여했다. 기름에 젖은 머리를 탁 비어 던지고 일약 민족주의자가 됐다"고 고백했다. 김 교사는 "편견과 달리 당시 기생들은 뛰어난 지적 능력과 경험을 바탕으로 주체적인 삶을 살았다"며 "정칠성이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은 어쩌면 예정된 일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짧은 일본 유학 생활을 거친 뒤 1923년 고향 대구로 돌아와 독립운동에 본격 투신했다. 특히 정칠성은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로 거듭났다. 정칠성은 그해 10월 대구명신학교 강당에서 '대구여자청년회' 창립총회를 열고 대구 첫 독립 여성단체를 조직한 뒤 계몽운동을 벌였다. '3·8 세계여성의날'(당시 부인데이)을 맞아 '국제부인운동의 의의'라는 강연을 하기도 했다.
정칠성에게 '독립'이란 일제로부터의 해방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낡은 체제를 혁파하고 여성을 사회 주체로 격상시켰을 때 진정한 독립이 이뤄진다고 여겼다. 대표적인 항일여성운동 단체였던 근우회 중앙집행위원회 수장으로 활약할 당시 정칠성은 잡지 '삼천리'에 기고를 통해 "우리들이 새로운 양성 관계를 세우려면 뭐니 뭐니 해도 경제적 독립부터 얻지 않으면 다 헛일이 됩니다"라고 강조했다.
이 같은 활약에도 정칠성과 현계옥은 현재까지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정칠성은 1946년 월북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으나 1958년 김일성의 장기 집권에 반대하다가 숙청됐다. 현계옥은 현정건이 숨진 뒤 1928년 시베리아로 망명해 모스크바에서 대학을 졸업했다.
최세정 대구여성가족재단 연구위원은 "대구의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인 두 사람의 공적이 빛을 보지 못해 아쉽다"며 "이제라도 이들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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