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은 노비, 백정 등과 함께 조선의 8가지 천한 신분, 즉 '조선 팔천'(朝鮮 八賤)이라 불린다. 하지만 기생은 높은 지식수준과 경제력, 정보 수집에 용이한 지위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적극 나섰다.

달성권번의 초대 회장으로 '앵무'라는 기명을 썼던 염농산(1860~1946)이 국채보상운동 당시 100원(현재 약 1억원)의 거금을 쾌척하며 "기생은 돈 많은 사람만을 섬겨서는 안 되며, 만신창이가 된 나라를 위해서 한 몸을 바칠 수도 있어야 한다"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기생이 곧 성매매 여성이라는 인식은 일본 유곽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19세기 후반 유곽 문화가 조선에 상륙하기 전까지만 해도 기생은 종합예술인, 오늘날의 연예인과 같은 개념이었다.
지역사체험연구회 소속 전은정 매천고 역사교사는 ▷사회 활동이 가능했던 직업 ▷높은 의식 수준 ▷성 상품화에 대한 저항을 기생이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3요소로 꼽았다.
전 교사는 "당시 기생들은 바깥출입이 비교적 자유로운 데다 신문물을 일찍 접한 지식인과 교류하며 정보를 습득해 독립정신을 내면화하기 쉬운 환경에 있었다"고 설명했다.
아무나 기생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당시 권번이라 불린 기생조합에 가입하려면 뛰어난 용모는 물론이고 가사 문학, 판소리, 한문, 악기 등에 대한 상당한 조예가 필요했다. 조합 가입 뒤에도 체계적인 '직무교육'을 받았다.
전 교사는 "기술과 학식을 두루 갖춘 기생의 높은 의식 수준은 당시 시대 상황을 이해하게 했고, 독립운동 참여의 초석이 됐다"고 했다.

기생의 직업 환경과 시대 의식은 일제의 성 상품화에 대한 대항으로 이어졌다. 1908년 일제가 '창기 단속령'을 공포하며 예술인이란 전통적인 개념에서 성매매 여성이라는 창기의 이미지가 더해졌던 것이다.
전 교사는 "기생의 지위가 격하되는 동시에 자본주의 사상이 도입되자 이들은 앞장서 성 상품화에 대항했다"며 "당시 기생들은 천한 신분이 아닌 엄연한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으려 자신들을 통제하던 일제에 저항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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