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만세운동 현장, 지금은] 시민 문화의 거리로 탈바꿈한 안동 3·1운동 시발지

(왼쪽부터) 이동일 광복회 경북지부장, 손병선 광복회 안동지회장, 김화석 안동교회 원로장로가 안동 문화의 거리 광장에서 안동지역 만세운동을 소개하는 동판을 보고 있다. 김영진 기자
(왼쪽부터) 이동일 광복회 경북지부장, 손병선 광복회 안동지회장, 김화석 안동교회 원로장로가 안동 문화의 거리 광장에서 안동지역 만세운동을 소개하는 동판을 보고 있다. 김영진 기자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안동의 선비 향산 이만도 선생은 24일간의 단식 끝에 순절했다. 이 선생의 순절은 전국 선비들의 '자정순국'(自靖殉國)을 이끌었으며, 목숨을 끊지 못한 안동의 선비들은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떠났다. 해외 항일투쟁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그렇게 치욕의 세월이 흘러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타올라 전국으로 번진 만세운동 소식에 석주 이상룡 선생의 동생인 만지 이상동 선생은 조용히 준비에 나섰다. 급기야 만세운동은 11일 이웃의 포항과 의성에서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이틀 뒤인 13일 안동장날을 맞아 55세의 이상동 선생은 태극기를 그린 종이 방패연을 가슴에 품고 삼산동 곡물전(지금의 신한은행과 농협 안동시지부 중간지점) 앞에 나섰다.

이 선생은 사람들이 가장 많은 오후 5시 30분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가슴에 품었던 태극기를 흔들면서 연신 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달렸다.

100년이 흐른 지금, 이 곳은 차 없는 거리인 '안동시민문화의 거리'로 탈바꿈해 있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은 올해 이곳에는 태극기 우산, 태극기 바람개비, 태극기 꽃으로 그날의 역사를 되새길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이동일 광복회 경북지부장(왼쪽), 손병선 광복회 안동지회장(오른쪽), 김화석 안동교회 원로장로가 웅부공원에 설치된 안동경찰서·대구지법 안동지원의 옛터를 표시하는 동판을 보며 당시 만세운동 현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영진 기자
이동일 광복회 경북지부장(왼쪽), 손병선 광복회 안동지회장(오른쪽), 김화석 안동교회 원로장로가 웅부공원에 설치된 안동경찰서·대구지법 안동지원의 옛터를 표시하는 동판을 보며 당시 만세운동 현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영진 기자

이 선생이 만세를 외쳤던 곳과 불과 동쪽으로 200여m가 채 안 되는 거리에는 당시 경찰서와 검찰, 법원이 있었다. 만세운동 과정에 붙잡힌 숱한 안동인은 그곳에서 고문과 수감생활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지금은 고문이 행해졌던 곳이 한양아파트로, 경찰과 법원 등이 있던 자리에는 문화공원과 웅부공원 등으로 변해 시민들이 산책을 하거나, 공연 등을 하는 문화공간으로 변모해 있다.

1919년 3월 13일 당시 이 선생이 1인 만세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잡혔다는 소식은 안동지역의 만세운동에 불을 지폈다. 안동 만세운동은 같은 달 27일까지 총 14차례에 걸쳐 경북 내에서 가장 많은 1만명 이상 참가하는 대규모 운동이었다.

당시 18일 정오쯤엔 기독교인 30여 명이 이 선생이 외쳤던 안동면 삼산동 곡물전 앞에서 만세를 외쳤다. 이 과정에서 주동자 14명이 체포되고 시위 군중은 해산됐다. 하지만 오후 6시쯤엔 기독교인 60여 명이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운동을 재개했다.

이제 이 곳 주변은 안동관광의 '핫플레이스'로 자리잡고 있다. 전국적 인기를 끌고 있는 맘모스제과 빵집과 안동의 명소인 떡볶이, 찜닭골목이 인근에 조성돼 있으며 도시재생의 중심으로 바뀌었다.

지금 이곳에는 당시 만세운동을 기념, 독립운동 사적지를 안내하는 동판이 바닥에 새겨져 있다. 동판에는 '이상동 선생의 단독시위를 시작으로 18일 2천500여 명, 23일 3천여 명이 이곳에서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일제의 총칼에 순국했다'고 쓰여 있다.

이상동 선생이 1인 만세운동을 벌였던 신한은행 앞의 지금의 모습.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이 곳은 다양한 태극기로 꾸며져 그날의 기억을 되새기도록 하고 있다. 엄재진 기자
이상동 선생이 1인 만세운동을 벌였던 신한은행 앞의 지금의 모습.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이 곳은 다양한 태극기로 꾸며져 그날의 기억을 되새기도록 하고 있다. 엄재진 기자
이상동 선생이 1인 만세운동을 벌였던 신한은행 앞. 당시 1차만세 시위가 벌어졌던 곳이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제공
이상동 선생이 1인 만세운동을 벌였던 신한은행 앞. 당시 1차만세 시위가 벌어졌던 곳이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제공

손병선 광복회 안동시지회장은 "당시 안동의 만세시위에는 나이를 떠나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이 참여하는 진정한 애국 운동이었다"고 설명했다.

1919년 3월 23일 이곳에서는 3천여 명 이상의 시민이 모여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시위는 이튿날 오전 4시까지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수비대는 실탄을 발사해 군민 30여 명이 사망하고 5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동일 광복회 경북지부장은 "당시에 일제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잔인한 만행을 저질렀다. 수감자들에 모진 고문을 가했다"며 "수감자 대부분이 영양결핍과 후유증으로 옥사하거나 출소 후에도 장애를 지니고 살아야 했다"고 말했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