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당선작 '열망']⑦김영숙

일러스트 전숙경(아트그룬)
일러스트 전숙경(아트그룬)

6. 가난은 죄

내가 들풀이라는 야학교에 다니며 공부에 열중할 때 나를 눈여겨보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아직까지 마치 송충이처럼 들러붙어 돈

을 뜯어가는 아저씨라는 사람, 바로 내가 맨 처음 서울에 왔을 때 우연히 도움을 받았던 그 사람이 나를 괴롭히는 걸 목격한 서강우가 앞장서 떼어내 줌으로서 나는 그때부터 서강우를 조금 색다른 눈으로 봤고 시간이 흐르면서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법은 당신 같은 사람을 처벌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인간벌레들 말입니다. 더 이상 숙자씨를 괴롭히면 제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하세요. 이제까지면 됐지 계속 돈을 뜯어 가면 되겠습니까. 은혜를 입었다니 도리 상 그동안은 어쩔 수 없다지만 이제부터 또다시 그런 행위를 계속한다면 법으로 대응할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당장 돌아가세요. 그리고 다시는 오지마세요."

처음엔 건방진 자식 네가 뭔데, 하고 대들던 아저씨라는 사람은 서강우의 단호한 태도와 법적대응이라는 말에 움찔 몸을 사리더니 이내 돌아서 가버린 뒤 전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 번 배움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무슨 말로도 무시하고 들으려고 조차 하지 않던 내 경우와 사뭇 다른 대처방법, 그렇다! 그래서 사람은 배워야한다! 말이 있지 않은가,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그동안 알지 못했기에 일방적으로 당하고 살았던 모든 점이 새삼 내 가슴을 두드리고 강한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고마워요."

나는 부끄러운 내 일면이 드러났으나 어려운 입장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에 서강우를 향해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서강우는 당연하다는 듯 별로 큰 내색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점이 더욱 좋았다. 그리고 한편으로 여러 사람과 비교해 보며 역시 배운 사람과 배우지 못한 사람의 차이를 절감할 수 있었다. 더욱 배움에 대한 열망이 내 가슴 안에 꿈틀거렸다. 나는 잠시도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 잠을 잘 때도 길을 걸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여전히 내 머릿속엔 영어단어와 국어책속 글자들이 아른거렸고 입으로도 연신 외우며 공부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야학교를 가기위해 거리로 나오니 미군

지프차가 달린다. 아이들이 그 뒤를 쫓아간다. 미군들이 기묘한 웃음을 얼굴에 담고 가끔 초콜릿을 던져준다. 아이들은 환호하며 줍기 바쁘다. 배고픈 시절, 미군들의 존재는 과연 우리에게 무엇이었을까. 비렁뱅이, 구두닦이, 양아치들이 득실거리는 거리의 풍경, 코를 질질 흘리며 머리엔 기계독이 올라 마치 버짐 꽃처럼 군데군데 벗겨진 허연 상태에서 그래도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미군지프차를 뒤쫓는 많은 아이들이 내 눈 속에 담겼다. 거기에 장터 비슷한 골목길에는 하얀 국수를 나무채반에 받쳐두고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멸치육수를 끓이느라 분주하다. 가장 인기가 좋은 부대찌개도 한 몫을 하며 잘 팔려나간다. 일명 부대찌개는 미군식당에서 음식물쓰레기를 거둬 모아 소독 차 팔팔 끓이면 그게 바로 부대찌개였다. 개나 돼지 같은 짐승한테는 그냥 주고 그나마 사람들이 먹는 것은 열을 가해 살균했던 것이다. 그것도 없어 못 먹는다. 가끔 생산지를 떠나 어딘가 시장을 향해 이동하는 말 수레에서 고구마 말린 걸 던져줄 때는 아이들이 우르르 한데 몰려 우왕좌왕 난리법석을 부리고 장난기가 발동한 어느 인부가 커다란 생고구마를 힘껏 아이들을 향해 던지는 경우 느닷없이 이마에 맞고 나뒹구는 아이들도 눈에 띄었다. 눈을 한쪽 손으로 가리고 다른 한손으로 더듬거리며 고구마를 찾는 아이, 나는 이런 광경을 여러 번 목격했다. 오늘도 여전히 아이들이 몰려다닌다. 나는 한숨을 푹 쏟아냈다. 가슴한편이 아릿하고 아팠다.

넓은 길을 벗어나자 좁은 골목사이로 연한 불빛이 새어나온다. 여자의 목소리도 들린다. 깔깔대며 웃는 소리 뭐라고 연신 재잘거리는 소리, 거기에 남자의 목소리도 가끔 섞여있다. 무척 즐거운 듯하다. 나는 귀를 쫑긋했지만 무슨 얘긴지 내용은 전혀 알 수 없었다. 공장에서 야학교로 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었는데 신작로로 가는 거보단 골목길로 가는 게 훨씬 가까웠다. 그런고로 나는 매번 좁은 길을 택해 야학교를 향하곤 했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책보자기를 싸들고 야학교를 향하는 중이다. 그때였다. 골목길로 막 접어드는데 간드러진 여자의 음성이 들려온다. 나는 순간 멈칫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왜이래, 간지럽게. 하지 말라니까."

"가만있어, 튕기긴. 돈이 적어서 그래? 더 줄게. 얼마주면 돼? 달라는 대로 줄

테니 고분고분 말 들어."

남자의 목소리가 음흉하게 뒤섞인다.

"아이, 정말 왜이래. 술집여자는 자존심도 없는 줄 아는 감. 창녀하곤 급이 다르다고 몇 번을 얘기해야 알까나."

"알지. 그러니까 내가 자주 찾는 거 아냐. 요즘은 창녀보다 더 더러운 게 양색시지만."

남자의 음성이 사뭇 진지하게 들려왔다.

"어디 비교할 때가 없어 양갈보람. 치!"

"고럼, 고럼."

"엄연히 차원이 다르다고 했을 텐데. 그보다 난 학벌 미모 어디한곳 나무랄 데 없는 귀재라는 거 몰라? 그리고 무엇보다 순정파라고 얘기했는데 잊어버렸남?"

여자가 눈을 흘기는 모양 같다.

"잊긴. 머릿속에 입력된 지 언젠데. 흐흐."

남자가 웃음을 흘렸다.

"일편단심 민들레, 맞지?"

"기억력 하나는 알아줘야해."
까르르 소리를 내며 여자가 곧 숨이 넘어갈 듯 웃어재낀다.

"이젠 그만 애태우고 빨리 불 꺼. 내 사랑 그대여."

"참, 고양반 보채긴. 알았으니 옷이나 벗어. 술상은 치워야할 거 아냐."

"치우긴 뭘 치워. 막걸리냄새가 더욱 성욕을 돋워준다는 거 잘 알면서."

남자가 확 덮치는지 요란한 쟁반소리와 막걸리사발 뒤집어지는 소리가 함께 들려온다.

"까르르, 깔깔!"

그러고 보니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다. 누구지? 나는 자못 긴장된 눈초리로 그곳을 연신 주시하며 숨을 죽이고 촉각을 곤두세웠다. 기억날 듯 말 듯 한 어지러움이 연속해 이어졌다. 그 순간이었다. 확실하게 연결돼 떠오르는 얼굴, 그리고 목소리! 나는 한 손을 들어 이마를 탁, 하고 때렸다. 분명하다. 그 언젠가 변소에서 목매달아 죽은 안재민의 여자 지화영, 바로 그 여자인 것이다. 나는 어질어질한 정신을 바로 할 수 없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어찌 이런 해괴망측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3월12일 자 시니어문학상 면에는 논픽션 당선작 '열망' 8회가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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