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창원의 기록여행]70년 전의 'SKY캐슬'

박창원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박창원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금전으로 입학하는 예는 과거 왜놈들이 하였으니 해방 후 조선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구체적인) 실례가 있다면 철저 적발 처단하겠다. 돈으로 입학하는 것은 소위 유지신사(有志紳士) 자제들이 많으나 그자들은 두뇌가 학습 불량하다고 본다.'(남선경제신문 1948년 6월 30일)

실력 대신 돈으로 입학하는 학생들의 이야기다. 일본 사람을 업신여겨 낮잡아 부르던 이름이 왜놈이다. 감독관청의 담당자가 오죽했으면 왜놈이라는 단어로 빗댔을까. 일제 잔재로 연결지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돈으로 입학하는 것은 유지신사의 자제들이라는 대목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지역에서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이 유지신사다. 하지만 그들도 자식을 위해서라면 불법이든 반칙이든 두 눈 딱 감았다. 1948년의 경우 전국적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학생이 19만여 명이었다. 반면에 중학교의 수용 인원은 고작 7만 명이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아예 진학을 포기하는 학생도 많았다. 그런 걸 감안해도 입학 인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일제강점기 때의 초등학교 입학 경쟁보다 나을 바 없었다. 1939년 대구부 내 초등학교 입학생이 3천200명이었다. 7개 초등학교 입학 정원은 2천300명이었다. 900여 명은 처음부터 학교 문턱을 넘지 못했다.

돈으로 학교와 거래가 수월했던 것은 이처럼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가 한몫했다. 입학금 외에 학교서 정한 기부금을 내지 못하면 입학을 허락하지 않는 학교도 있었다. 학교 입학과 편입이 어렵다 보니 이를 둘러싼 금품수수 사건도 심심찮게 불거졌다. 그렇다고 학교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열악한 재정이 문제였다. 돈이 없다 보니 교실 증축이나 학교운영비도 학부형들의 주머니에 의존해야 했다. 이러니 교육 당국이 학교의 강제 기부를 금지하고 요릿집 등에서 향응으로 교사를 매수하면 합격을 취소한다고 밝혀도 빈말로 들릴 뿐이었다. 당시는 공립중등학교라도 입학금이 1만~2만원이었다. 보통 월급쟁이는 한 달 월급을 다 털어 넣어야 했다. 공부는 실력이 아니라 돈으로 한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서민들은 높은 입학금에다 각종 기부금 등으로 자녀가 어렵게 합격해도 마냥 좋아할 수가 없었다. 부담스러운 입학금을 기일 내에 내지 않으면 입학이 취소됐다. 그런 학생의 빈자리는 수십만원 이상의 거액을 내는 보결생으로 채워졌다. 말하자면 보결생은 부자들의 손쉬운 입학 통로였다.

1958년에 드러난 경북여고 학생의 합격 취소 사연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대장간 일을 하는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극심한 생활난으로 입학금을 제때 내지 못했다. 겨우 돈을 구해 학교를 찾아갔을 때는 이미 20명 가까운 보결생이 그 자리를 메운 뒤였다. 입학금이 없어 학교를 포기한 학생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대학은 어땠을까. 해방 이듬해 대구의과대학 학생들이 지역 유지의 정실 입학과 부정 입학을 비판한 데서 어림잡아 짐작할 수 있다. "공부는 돈으로 한다"는 말은 70년 전에 이미 유행했다. 그들만의 리그인 '스카이(SKY) 캐슬' 또한 드라마 이전에 존재했던 것처럼. '스카이 캐슬'의 주역은 그때도 학생은 아니었다. 막 시작된 새 학기에도 그럴 것이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