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오후 옛 여천장터(현재 포항 죽도시장 인근).
큰 시장이었던 이곳은 강산이 10번이나 변할 동안 과거의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크고 작은 건물들만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장터의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오간 데 없고, 간혹 지나가는 차 엔진 소리와 사람들의 발소리만 들릴 뿐, 적막감마저 들었다.
여천장터는 1919년 3월 11일 선조들이 일제의 총칼 앞에서 목숨을 걸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던 곳이다. 당시 수백 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며 조국 해방을 갈망했고, 일제가 총부리를 들이대며 강제해산 시키기까지 수 시간 동안 만세운동을 계속했다.
이들은 다음 날 저녁에도 여천장터 인근 당시 포항교회(현재 포항소망교회)에 모여 태극기와 횃불을 들고 수㎞를 걸으며 독립 만세 행진을 벌였다. 이는 포항 만세운동의 시작이었다. 행진이 진행되는 동안 군중은 1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행진은 일본인들이 밀집해 살던 본정(현재 상원동 일대)을 관통해야 했지만, 이들은 두려움을 떨쳐내고 당당하게 이 길 위에 발자국을 찍었다.
일제강점기 포항면의 인구 6천500여 명 중 한국인이 4천900명, 일본인이 1천600명 정도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5명 중 1명이 만세운동에 가담한 셈이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본정을 중심으로 수산업, 상업, 금융업 등을 장악해 부를 축적했으며, 일본은 이들을 보호하고자 대구헌병대 포항헌병분대를 주둔시켜 민족운동을 삼엄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이런 통한의 역사를 가진 여천장터 일대의 모습은 세월이 흘러 많이 달라졌다. 포항교회는 한번 허물어진 이후 1934년 교회 터 위에 다시 지어져 예전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100년 전이라면 항상 북적였을 교회 앞 분위기도 현재는 교회 예배가 있는 날이 아니면 썰렁하기만 하다.
이날도 포항교회 앞은 동네마트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 소리를 제외하면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교회 오른쪽 골목을 따라 이어지는 만세 행진 길 역시 분위기가 다르지 않았다.

옛 장터 부지에는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이 올라섰고, 사람들이 다니던 흙길은 아스팔트로 덮였으며, 길 양쪽에는 커피숍이나 주점 등 상가가 듬성듬성 자리잡고 있었다.
과거 포항 유흥을 대표하던 지역이 근처에 있어 한때 이곳에도 사람들이 몰리기도 했지만, 현재는 도심공동화 현상을 겪으며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탓에 삭막한 분위기마저 풍겼다.
'대한 독립 만세 외침이 이곳에 있었다'는 역사를 기록한 기념비라도 있다면 이 고요함을 선조들에 대한 예우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길 위에 그런 것 하나 없다 보니 씁쓸하기까지 했다.
다행히도 지난 1일 포항시가 3.1운동 100주년 및 포항시 승격 70주년 기념사업으로 '포항 만세 축제'를 열고, 경북 최초로 진행된 포항 만세 운동을 시민들에게 알렸다. 또 거리 퍼레이드를 하며 선조들의 만세 행진을 재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행사가 끝난 이후 여천장터 만세운동은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힐 날만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길에서 만난 이조원(37) 씨는 "여기에서 만세운동이 있었다는 것도, 행진이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여태껏 포항에서 살았다. 중요한 곳이 이렇게 방치돼 있었다고 생각하니 선조들에게 죄송하고, 자식들에게 부끄럽다"며 "어떤 형태로든 포항 만세운동에 대한 역사를 후대에 알릴 방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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