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양성평등 수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9개국 중 최하위다. 지난 8일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한 2019년 '유리천장(Glass-ceiling) 지수'에 따르면 한국은 100점 만점에 20점을 기록해 평균 60점을 한참 밑돌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이런 여성들의 사회적 활동에 대한 제약이 더욱 컸을 터. 하지만 이런 유리천장을 각자의 방법으로 깨부수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능력자' 여성들이 있다. 이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성공적으로 입지를 다졌고, 독립운동에 몸 바쳤다.
32년 짧은 삶 동안 23편의 소설과 38편의 산문, 1편의 시를 남기며 시대의 아픔을 펜으로 표현한 항일운동가이자 여류소설가 백신애, 독립군 최초이자 조선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상하이 사변 당시 일본군에게 기관총을 쐈던 파일럿 권기옥, '하와이 이민 1세'로 가구사업으로 마련한 돈을 평생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놨던 사업가 이희경이 그들이다.

◆시베리아 떠돌던 한국인 삶 그린 '꺼래이', 낭독공연으로 재탄생
"시베리아의 모진 바람은 이따금 눈보라와 함께 이 가엾은 '꺼래이'들에게 불어닥친다."
백신애(1908~1939)가 1934년 1월 잡지 '신여성'에 발표한 단편소설 '꺼래이'의 한 부분이다. 꺼래이는 고려의 러시아식 발음이다. 소설에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스무살의 나이로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일제에 체포돼 고문을 받고 추방당했던 백신애의 경험이 녹아 있다.
소설의 주인공 순이는 식민지 조선에서 자유를 갈망했던 백신애와 시베리아를 떠돌던 수많은 고려인을 대신해 위기를 헤쳐나가는 당당한 여성이다.
경북 영천 출신인 백신애의 흔적은 대구 중구 향촌동 대구문학관에서 찾을 수 있다. 백신애는 대구문단 47인을 소개한 공간에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다. 꺼래이 등 백신애 작품 3편이 실린 1937년 조선일보 현대조선여류문학선집도 전시돼 있다.
꺼래이는 지역 극단의 생동감 있는 낭독공연으로 재탄생되기도 했다. 2015년 첫선을 보인 낭독공연 꺼래이는 매회 120명 이상의 관객이 모이는 등 큰 호응을 얻었다. 올해는 공연 횟수를 더 늘려 5월쯤 시민들을 만날 계획이다.
지난해 낭독공연에 참여했던 김민선 극단 나무의자 대표는 "빵 하나를 나눠준다는 소식을 듣고 시베리아 벌판으로 향했던 고려인을 연기하는 것은 슬프면서도 영적이었다"며 "공연을 하며 일제강점기를 불꽃 같은 삶을 살았던 신여성 백신애를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최초의 여성 비행사 권기옥과 뮤지컬 '비 갠 하늘'
대구 중구 근대골목에 위치한 독립운동가 이상정 장군의 고택(바보주막) 벽면에는 한 여성이 남자 둘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살포시 웃고 있는 사진이 있다. 자못 결연해 보이기도 하는 이 사진은 최초의 여성 비행사이자 독립운동가 권기옥(1901~1988)이 남편 이상정, 그리고 시동생이자 민족시인 이상화와 함께 찍은 것이다.
학창 시절 평양에서 미국인 비행사 아트 스미스의 비행을 관람한 뒤 비행사의 꿈을 키운 권기옥은 1925년 운남 육군 항공학교를 졸업하고 조선 최초의 여성 비행사가 됐다. 1932년 일본이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을 때 권기옥은 비행기를 몰고 나가 일본군에게 총을 쏘기도 했다.
물론 권기옥은 독립운동은 비행사의 꿈을 꾸기 이전부터 시작됐다. 권기옥은 숭의여학교 재학 시절, 여성비밀 결사단체 송죽회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가 하면, 3·1운동 참여했다가 3주 구류 처분을 받고 감금되기도 했다.

평안남도 출신인 권기옥과 대구의 인연은 평양여자전도대 활동 당시 대구를 방문했던 것이 전부다. 하지만 권기옥의 삶은 대구시립극단의 창작 뮤지컬 '비 갠 하늘'과 연극 '비상'으로 재탄생해 대구에 남아 있다.
최주환 대구시립극단 예술감독은 "지난 2015년 취임 이후 근대골목에서 권기옥의 사진을 보고 영감을 받아 작품을 만들었다"며 "전도를 가장해 전국을 돌며 독립운동 의식을 고취했던 권기옥의 삶을 뮤지컬과 연극으로 조명해 시민들에게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업으로 번 돈 평생 임시정부에 보낸 사업가 이희경
대구 출신 이희경(1894~1947)은 사업가로 성공해 평생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에 힘을 보탠 인물이다. 신명여학교를 졸업한 이희경은 '사진 신부'(사진만 보고 팔려가는 신부)로 하와이에 노동이민을 떠났고 1912년 남편 권도인을 만나 결혼했다. 당시는 7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생계를 해결하려 노동이민을 떠났고 이희경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다만 대구에서 가정형편이 어렵지 않았기에 이희경은 학업을 목표로 하와이로 떠났으나 예상과 달리 타국에서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이희경은 권도인과 한국에서 쓰던 '대나무 발'에서 사업 아이템을 얻었다. 1928년 사업을 시작한 부부는 대나무 발에 하와이 날씨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려 넣은 커튼으로 특허를 획득했고 샌프란시스코에 공장을 세울 만큼 성장했다.
이희경은 그해 하와이에서 영남부인회를 조직해 본격적인 독립운동 자금 지원에 나섰다. 본격적인 자금 지원에 나선 1935년부터 해방까지 10년간 부부가 내놓은 돈만 1만 달러에 이른다.
정일선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지금, 여성독립운동 전반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져 한순간이 아닌 꾸준한 관심으로 연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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