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당선작 '열망']⑧김영숙

일러스트 전숙경 (아트그룬)
일러스트 전숙경 (아트그룬)

번연히 시집가 잘 사는 줄만 알았는데 겨우 인생의 막다른 길, 니나노 집에서 몸을 파는 여자가 돼 있다니. 나는 나도 모르는 순간 악! 하고 비명을 지를 만큼 마음속이 들끓고 분함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듯했다.

갑자기 눈앞에 안재민이 떠오른다. 죽은 그의 환영이 어른어른 계속해 얼비친다. 숨이 막혀 도저히 제대로 쉴 수가 없다. 나는 멈춰 세운 발을 단 한걸음도 더 이상 떼지 못하고 마치 석고대상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서 늦은 밤 찬이슬에 몸을 맡겼다.

새벽녘, 남자가 허름한 문을 밀치고 나왔다. 그리고 어디론가 쏜살같이 몸을 감췄다. 덩치가 크고 우람한 체구의 남자였다. 지화영은 여린 몸매에 얼굴이 참 예뻤던 걸로 기억됐다. 마치 계란처럼 타원형에 매끈한 결이 유독 흰 피부와 함께 어우러져 우리 모두는 늘 감탄하며 부러움의 눈초리로 바라보곤 했었다. 안재민이 반할만도 했던 지화영, 그녀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는 이어지는 궁금증을 견딜 길 없어 무작정 그녀가 몸담고 있는 술집 안으로 쑥 몸을 들이밀었다. 조용했다. 인기척이 들렸을 텐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

다.

나는 좀 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안쪽에 있는 허술한 방문을 살며시 열어봤다. 널브러진 옷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지화영의 흐트러진 머릿결도 눈 속에 빨려 흡수됐다. 나는 심호흡을 거듭했다. 아직 세상만사 모르고 잠에 취해있는 지화영, 그녀의 꼴이 정말 가관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살며시 방안으로 들어가 그녀 곁에 섰다. 그런 다음 허리를 약간 구부리고 이불도 덮지 않고 완전 나체로 뒤엎어져 자고 있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웠다.

부스스 눈을 뜨고 그녀가 나를 바라본다. 누구? 하는 눈초리다. 나는 또 한 번 숨을 내뿜었다. 그때야 그녀가 눈을 부비고 나를 찬찬히 쳐다본다. 순간 눈이 마주치자 지화영의 표정이 일순 바뀌었다. 자못 놀란 모양이다. 화들짝 몸을 일으켜 이불을 끌어당겨 덮는다. 알몸을 가리고자함인 거 같다. 그렇다고 더러운 사생활이 감춰지겠는가. 곳곳에 속옷이 나뒹군다. 유독 역한 화장품냄새와 술 냄새가 뒤섞여 후각을 파고든다. 나는 일순 상을 찌푸렸다. 그때 지화영이 입을 열고 나를 향해 말을 던졌다. 뜻밖이었다.

"너, 뭐야?" 눈초리가 매섭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뭐냐고!"

갑자기 지화영이 목소리 톤을 높여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나는 머뭇거림 없이 대뜸 반문했다.

"나, 모르겠어?"

지화영이 눈망울을 굴렸다. 아무래도 기억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안재민 공장장이 다니던 가발공장, 그래도 모르겠어? 그렇담 '김숙자'하면 생각날까?"

내가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순간 지화영의 얼굴색이 새하얗게 변해갔다. 그녀

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자신의 치부가 드러난 지금 이 순간 뭐라 할 말이 없는 듯 보였다. 입술이 새파랗다. 나는 큰 숨을 다시 한 번 들이 내쉬고 그녀 앞에 몸을 턱 앉혔다. 그녀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가슴이 답답하고 몹시 아팠다. 동정과 연민이 함께 믹서 돼 내 가슴 한곳을 마구 흔들어댔다. 나도 따라 울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지화영이 입을 열고 말하기 시작했다. 변명인지 억울함인지 모를 애매한 하소연인 듯싶었다.

"내가 무조건 배반했을까? 남녀 간의 일은 누구도 모르는 법이지. 물론 난 재민오빠의 덕으로 공부했고 잠시 행복할 수 있었어. 하지만 내 꿈은 어쩌라고. 처음엔 소박했지만 머릿속에 먹물이 들어가고 좀 더 넓은 세상을 접하다보니 난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걸 깨닫게 됐지. 그때부터 벗어나고 싶은 소망이 내 마음 안에 자리하게 됐던 거야. 이보다 더 크고 환한 세상 그걸 꿈꾸며 숨죽이고 살았는지도 몰라.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나도 피해자야. 모두가 돌멩이를 던졌지만 난 묵묵히 참아냈어. 그동안 베풀어준 은혜에 보답코자 견뎌낸 거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상대하면 뭘 할까싶어 그랬던 거지. 지금 생각하면 확 쏟아내고 말걸 그게 악영향이 돼 결국 요 모양이 되고 말았지만."

그녀는 계속 울며 말을 멈추지 않고 이었다.
"지금은 팔자려니 해. 아님 업보겠지. 다른 사람들은 인과응보라고 할 테고. 하지만 억울해." 지화영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뭐가?"

"일방적으로 나한테만 욕하잖아. 진짜 내막은 알지 못하면서."

내 물음에 지화영은 코를 씰룩거리며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진짜 내막? 그게 뭔데?"

나도 콧바람을 날리며 물었다.

"열네 살에 재민오빠 만나 내 사춘기를 잃었어. 뭐가 억울하고 손해 봤는데? 내 몸 망가진 건 생각 안 해? 그것 땜에 결국 남자로부터 버림받았어. 그 알량한 과거 땜에."

그녀가 또다시 흐느꼈다. 자신의 말끝에 감정이 복받친 모양 같았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망연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까지 한쪽 편에서 일방적으로 욕하고 탓했던 모든 것이 한순간 허물어지는 느낌이었다. 가해자로 알고 있던 지화영이 지금 이 순간 자신도 피해자라고 서러움을 토해내며 말하고 있다. 재삼자인 내 입장에서 어찌 생각해야할까. 망자는 말이 없다. 오직 살아있는 자만이 변명이나마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그렇게 오랫동안 멍을 때리고 있었다. 한참 뒤, 다시금 그녀의 목소리가 내 귓전으로 흘러들었다.

"물론 내 잘못이 더 크다는 건 알아. 하지만 그땐 너무 어렸고 삶이 힘들었고 배가 고팠어. 그리고 배우고도 싶었고. 그렇지만 절대로 재민오빠를 이용할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았어. 진심이야. 은혜를 저버리면 안 된다는 거쯤 나도 알고 있어. 헌데 많이 배우고 더 넓은 세상을 만나고보니 정말 내 자신이 한심스러워 보이지 뭐겠어. 우물 안의 개구리가 그곳이 온 우주고 전 세계인줄 알고 살아가듯 난 그 당시만 해도 재민오빠가 내 전부라고 여겼거든. 그래서 무작정 뛰어들고 품에 안겼는데 후일 되돌아보니 그게 아니었어. 억울한 생각도 들고 이용당했다는 기분도 떨쳐버릴 수가 없더라고. 한창 사춘기 그 시절을 몽땅 재민오빠한테 바쳤다고 생각하니 분하기 그지없었으니까. 밤마다 맘껏 주무르고 핥고 난 마치 노예처럼 아니 받아먹는 돈만큼 대가를 치러야만 했던 거 같아. 나는 뒤늦게 깨달았지.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거."

(3월19일 자 시니어문학상 면에는 논픽션 당선작 '열망' 9회가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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