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만세운동의 현장, 지금은] 개발이 비껴간 영해 만세 현장, 100년 전 그 모습 그대로

시장·국도 모두 서북쪽으로 옮겨
주재소도 도로도 금융조합건물도…
개발이 비껴간 역사 보존 '아이러니'

영해만세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당시 영해시장 싸전(쌀가게) 일대. 가운데 도로가 당시 국도였고 이 도로를 따라 동해안 북부 최대 영해장이 섰다. 오른쪽엔 일제 수탈의 상징인 영해금융조합건물이고 왼쪽 골목 안쪽에 당시 영해주재소가 있었던 자리에 파출소가 있다. 김대호 기자
영해만세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당시 영해시장 싸전(쌀가게) 일대. 가운데 도로가 당시 국도였고 이 도로를 따라 동해안 북부 최대 영해장이 섰다. 오른쪽엔 일제 수탈의 상징인 영해금융조합건물이고 왼쪽 골목 안쪽에 당시 영해주재소가 있었던 자리에 파출소가 있다. 김대호 기자

1919년 영해만세운동 때 민중들이 습격했던 일제 영해주재소 자리. 현재는 영해파출소가 그 자리를 쓰고 있다. 김대호 기자
1919년 영해만세운동 때 민중들이 습격했던 일제 영해주재소 자리. 현재는 영해파출소가 그 자리를 쓰고 있다. 김대호 기자

영덕의 기미년 만세운동은 '영해 3·18 만세운동'으로 대표된다.

이 운동은 경북에서 보기 드물게 3천 명의 대규모 시위대가 격렬하게 저항한 운동으로 기록된다. 주재소 일경으로는 감당이 안 돼 대구의 일본 군대까지 시위 해산에 동원됐다. 맨손으로 일제의 총검에 저항한 이 시위로 군중 8명이 숨지고 16명이 다쳤다.

100년이 지난 지금, 경북 어느 지역보다 격렬했던 영해 만세운동 현장의 도로와 건물들은 상당수 옛 모습 그대로이다.

만세운동이 처음 일어났던 당시 영해시장 싸전(미곡 시장) 양쪽. 군중들이 습격해 일본 순사 스즈키를 굴복시키며 장악했던 당시의 영해주재소는 현재 영해파출소로 남아 있고 길 건너에는 일제 수탈의 앞잡이 역할을 했던 영해금융조합 건물이 남아 있다.

당시 경북 동해안 최대의 영해장은 현대화의 물결과 함께 서남쪽으로 옮겨갔다. 100년 전 좁은 국도에서 현재는 소방도로 격하됐다. 100년 전 3천여 민중이 지났던 골목에 개발이 비껴가면서 오히려 원형 보존된 것이 아이러니하다.

당시 만세군중이 지나던 길의 도로명 주소는 현재 예주2길로 이름 붙여져 있다. 정작 도로명 3.18만세길은 전혀 엉뚱한 곳에 있다.

영해3.18만세운동을 기념해 세운 현재 영해시장 인근 로터리에 세워진 영해면 성내리 의거탑. 100년 전 만세운동 때 영해시장의 위치는 지금과 달랐다. 김대호 기자
영해3.18만세운동을 기념해 세운 현재 영해시장 인근 로터리에 세워진 영해면 성내리 의거탑. 100년 전 만세운동 때 영해시장의 위치는 지금과 달랐다. 김대호 기자

영덕군과 영해애향동지회는 매년 3.18을 기념하는 만세문화제를 열지만 정작 100년 전 만세가 일어났던 곳 대신 새로 옮겨간 영해시장과 의거 기념탑 일원에서 열리고 있다.

영해면 주민 A(56) 씨는 "영해 사람들은 이곳에서 3.18만세운동 뿐만 아니라 갑오 동학혁명보다 수십 년 앞선 영해 동학혁명이 일어난 것에 대해 자부심이 크다"며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좀 더 내실있는 행사를 열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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