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기록의 나라'였다. 조선왕조실록 외에도 기록은 많았다. 학문의 발달로 사대부들은 다양한 글을 남겼다. 시와 수필, 상소, 행장, 비문 등을 통해 사상과 정치, 제도, 인물, 세태를 기록했다. 이 책은 왕조실록 밖에서 찾아낸, 조선의 또 다른 자화상이다.
◇ 세종의 황당하고 돌출적 행동
세종대왕은 성군으로 꼽힌다. 하지만 선조 때 문신 박동량(1569~1635)이 쓴 야사집 '기채잡기'는 '세종대왕이 밖으로 돌아다니기 좋아해 한 달 이상 대궐을 비우기 일쑤였고,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취하는 날이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덕형(1566~1645)은 '죽창한화'에서 '세종대왕이 형 효령대군의 증손녀를 한미한 집안 선비와 강제로 결혼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종이 여러 대군, 왕자들과 제천정(한남동에 있던 정자)에서 잔치를 열었는데, 마침 과거 시험 때라 전국 각지에서 온 선비들이 강어귀에 꽉 찼다. 세종은 그들 중 유독 의관이 남루하고 얼굴이 수척한 유생을 골라 효령대군의 증손녀와 혼인하라고 했다. 효령대군은 "가문이 대등하지 못하다"고 거절했지만 세종은 "초야에서 호걸이 많이 나왔다"며 강제로 혼인하게 했다.
◇ 인재 등용 막는 신분제 비판
유몽인(1559~1623)의 '어우야담'은 노비 반석평의 일화를 소개하며, 사대부들의 편협하고 배타적인 태도와 신분제도를 비판한다.
반석평은 재상가의 노비였다. 신분은 천했지만 성품은 바르고 영특했다. 재상은 그의 재주를 아껴 자신의 아들들과 함께 글을 가르쳤고, 나아가 반 씨 성을 가진 부잣집에 입양시켰다. 덕분에 반석평은 과거에 합격해 벼슬이 정2품 지충추부사에 이르렀다.
세월이 흘러 재상이 죽고 재상집은 몰락했다. 어느 날 반석평은 재상의 자식들을 거리에서 만났는데, 마차에서 내려 절을 올렸다. 반석평은 그러면서 나라에 글을 올려 국법을 어기고 벼슬에 오른 죄를 스스로 실토하면서 처벌해줄 것을 요청했다.
유몽인은 "우리나라의 인재는 중국의 천분의 일에도 못 미치는 데, 이들 가운데 신분이 천한 자는 벼슬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이는 사대부들이 편협하고 배타적이기 때문"이라고 당시로는 파격적인 지적을 한다.
◇ 겉모습과 다른 영의정 홍섬
묵재 홍언필(1476~1549)과 인재 홍섬(1504~1585)은 '부자(父子) 영의정'으로 명성을 떨쳤다. 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홍언필은 재물을 멀리하는 원칙주의자였다. 선조 때 영의정을 3번이나 중임한 아들 홍섬 역시 경서에 밝았으며 검소해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런데 '고금소총(조선 후기에 편찬된 편자 미상의 설화집)'에는 홍섬의 전혀 다른 모습이 실려 있다. 한여름 밤에 홍섬은 알몸으로 방에서 몰래 나와 평소 눈여겨보았던 여종의 방으로 살금살금 기어갔다. 인기척에 잠이 깬 아버지 홍언필이 그 광경을 보고는 "아들이 장성한 줄 알았더니 이제 막 기는 것을 배운 모양이구나"라고 소리쳤다. 깜짝 놀란 홍섬은 놀라 달아났다고 한다.
◇ 조선인의 유별난 모자사랑
조선인들은 유난히 모자를 좋아했다. 식사를 할 때 겉옷은 벗더라도 모자는 반드시 썼다. 이덕무(1741~1793)의 '앙엽기'는 이렇게 소개한다.
"갓의 폐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나룻배가 바람을 만나 기우뚱거릴 때 조그마한 배 안에서 급히 일어나면 갓 끝이 남의 이마를 찌르고 좁은 상에서 함께 밥을 먹을 때에는 남의 눈을 다치게 하며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는 난쟁이가 갓 쓴 것처럼 민망하다. (중략) 모자를 중시하는 풍습은 이미 고려 때도 존재했다. 무늬가 들어간 비단 재질의 두건을 소중히 여겼는데, 두건 하나의 값이 쌀 한 섬에 달했다."
◇ 조선 멸망 비사 생생히 기록
황현(시인·독립운동가; 1855~1910)의 '매천야록'은 조선이 멸망하는 과정의 비사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고종 32년(1895) 명성황후가 일본 자객 손에 시해당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했다. 황후가 시해됐을 때 고종의 심정은 어땠을까? 사건 이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애첩을 대궐로 불러들이는 것이었다. 그는 명성황후가 쫓아낸 상궁 엄씨를 황후가 죽은 지 불과 5일 만에 데려왔다. 엄씨는 왕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정사에 간여해 뇌물 챙기기에 급급했는데, 그 정도가 명성황후에 못지않았다.
한편 명성황후는 팔도강산을 돌아다니며 자식이 잘 되기를 비는 제사를 지냈다. 거기에 워낙 엄청난 비용을 지출하는 바람에 대원군이 비축해놓은 재물을 1년도 안 돼 탕진했다고 매천야록은 전한다.
◇ 왕에서부터 민간의 생활까지
책은 총 9장과 참고서적으로 구성돼 있다. 1장 '지존의 삶'에서는 왕들의 모습과 생애를, 2장 '위인들의 이면을 엿보다'에서는 예상 밖의 위인사를, 3장 '시대에 맞선 조선의 여인들'에서는 여성의 고단한 인생을, 4장 '위인들의 이면을 엿보다2'에서는 바람난 위인들의 모습, 5장 '전쟁의 참상을 기록하다'에서는 수치스러운 전쟁의 기록을, 6장 '그 시절 삶의 현장보고서1'에서는 민간의 삶을, 7장 '금강산도 식후경'에서는 조선인의 식습관을, 8장 '그 시절 삶의 현장보고서2'에서는 민간의 엽기적인 일들을, 9장 '이방인의 눈에 비친 조선'에서는 당시 조선에 살았거나 방문한 외국인들의 시선으로 조선을 이야기한다.
440쪽, 2만2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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