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영재의 대구음악유사]엿장수 가위소리

전 대구적십자병원 원장

원래 과자는 달아야 제격인데 요즘 과자는 달지 않는 게 고급이다. 설탕 많이 들어간 음식은 몸에 해롭다고 생각해서다. 설탕도 흰 것은 인기가 없다. 누런 설탕이 좋다고 한다. 사실은 누런 설탕이 흰 설탕보다 더 문제가 된다. 누런 설탕은 흰 설탕에 추가 물을 더해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6,70년대까지 설탕은 고급 음식 재료였다. 남의 집 찾아 갈 때 선물로 갖고 갔다. 더 옛날에는 설탕도 없어 엿이 우리의 단맛을 달래주고 있었다. 해방이 되고 한 동안 대구의 주전부리는 단연코 엿이었다. 목에 엿판을 걸고 팔러 다니는 행상도 있었지만 대량으로 파는 사람들은 리어카에 엿판을 싣고 다녔다. 대게는 가락 엿을 팔았지만 덩어리 엿을 통 체로 싣고 나와 쇠 주걱으로 잘라주는데 망치로는 엿가위를 썼다. 간혹은 검은 갱엿을 갖고 나와 대패로 긁어서 팔기도 했다.

크림이나 간장 장수는 북을 쳐서 관객을 모았지만 엿장수들은 엿 자르는 엿가위를 철썩이며 노래를 불렀다. "강원도 금강산/일만하고도 이 천봉/달(돌) 많아 구암자/십 구세야 나는 우리 딸이 만들어준/ 울릉도라 호박엿/둥기둥기 찹쌀엿/떡 벌어졌구나 나발엿/허리가 잘 쑥 장구 엿/올곳볼곳 대추 엿/네모야 반듯 수침 엿/어어 떡 벌어졌다 나발엿/이것저것 떨어진 것/운동화 백 켤레 밑 떨어진 것도 좋고/신랑 각시 첫날밤에/오줌 누다가 요강 빵꾸난 것도 쓴다/에헤 좋구 좋다. (엿단쇠소리)

엿장수 가위 역사는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지가 않다. 단원 김홍도의 그림에서 '씨름'이란 그림에 엿장수가 나온다. 목에 엿판을 건 소년인데 손에는 가위가 들려있지 않다. 단원이 1745년생인데 그 때까지는 엿가위가 호객행위에 쓰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6.25전쟁 때 대구는 유엔군이 주둔 하던 곳이라 못 살던 때라도 설탕이 든 주전부리감은 많았다. 껌이며 초콜릿, 비스킷과 사탕 등 단 음식이 있었다. 하지만 엿처럼 자주 먹을 수는 없었다. 애들은 엿장수 가위소리를 학수고대를 했다. 엿을 돈 주고 사먹은 애들은 없고 찌그러진 냄비나 깨어진 술병, 떨어진 고무신 등 고물이 거래의 수단이 되었다. 어떤 어리숙한 애는 엿장수가 고물만 받는 줄 알고 일부러 새 냄비를 찌그려 뜨려 엿 바꾸러 갔다가 엿 장수한테 혼나고 엄마한테 또 한번 된통 혼나기도 했다.

대구의 엿장수들은 가위를 엿 파는 도구로만 쓰고 있을 때 충북 청주시의 윤팔도는 이미 그 가위를 쑈 하는데 써먹고 있었다. 60년 말부터 70년 대 쯤에 그는 쌍가위 장단으로 전국엿가위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타며 유명해져 C.F도 찍고 종로의 술집 밤무대까지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2017년 그는 작고해도 엿도가는 년 매출 10억을 올리는 큰 회사가 되고 음대 출신인 그의 아들 윤일권은 재래시장을 다니며 엿가위를 치고 있다. 요즘은 손자 윤경식도 시장에서 아버지를 따라 다닌다고 한다.

일본에 '시니세(老鋪 ,노포)'라는 말이 있다. 짧게는100년 길게는 천년 이상을 넘긴 가계를 말한다. 우리나라의 노포는 겨우 동화약품과 두산그룹뿐이다. 중국에서는 동인당(퉁런탕)이 가장 유명하다. 일본 노포의 수는 200년 넘는 것만 약 3천 100여개가 된다. 그 중 가장 오래된 가게는 일본 야마나시 현의 '게이운칸' 여관으로 1천 300년을 넘기고 있다(705년에 설립). 우리나라 윤씨네 엿 공장이 이제 삼 대 째로 노포가 되어가고 있다. 대구의 엿가위 소리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품바와 함께 겨우 명맥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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