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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문의 한시산책] 봄날 아이들이 뛰노는 것을 보고[춘일제아희(春日題兒戱)] 이덕무

이종문 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이종문 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김 씨네 동쪽 뜨락 흰 흙으로 쌓은 담에 金氏東園白土墻(김씨동원백토장)

복사나무 살구나무 줄을 지어 서 있는데 甲桃乙杏倂成行(갑도을행병성항)

버들 껍질 피리 불고 복어 껍질 북을 치며 柳皮觱栗河豚鼓(류피필률하돈고)

나비 잡고 뛰어노네, 서로 어깨동무하고 聯臂小兒獵蝶壯(련비소아렵접장)

"지난 경진년·신사년 겨울, 내가 살고 있던 작은 초가는 추워도 정말 너무나도 추웠다. 입김이 대번에 성에가 되어, 이불깃에서 뽀드득 뽀드득 소리가 났다. 게으른 탓에 한밤중에 일어나서 '한서(漢書: 중국 한나라의 역사를 적은 책)' 한 질(帙)을 난데없이 꺼내, 이불 위에다 차례대로 덮어 추위를 막았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 때 십중팔구 얼어 죽었지 않을까 싶다. 어젯밤에는 집의 서북쪽 모퉁이에서 지독한 바람이 새어나와서 등불이 다급하게 흔들렸다.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논어(論語)' 한 권을 병풍처럼 세워 바람을 막고, 나의 이 탁월한 임기응변에 대해 내 스스로 대견스레 생각하였다." 위의 시를 지은 조선 후기의 문인 아정(雅亭) 이덕무(李德懋: 1741-1793 )가 남긴 산문의 한 대목이다. 그는 중인이라는 신분적 굴곡을 안고 태어났고, 병과 가난과 혹독한 추위 속에 젊은 날을 보냈다. 오랜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맹자(孟子)'를 팔아먹기도 했다.

바로 그 아정이 살던 마을에도 어김없이 새봄이 돌아왔다. 이웃집 담장 가에 살구꽃·복사꽃이 펑펑 꽃망울을 터뜨리자, 겨우내 방에 처박혀 지내던 동내 아이들이 '야호!'하고 뜀박질을 하며 우르르 골목으로 뛰어 나온다. 그들은 이제 막 물이 오른 푸른 버들가지로 피리를 만들어서 삘리리리 불고, 복어 껍질로써 작은 북을 만들어 둥둥 친다. '봄의 교향악'을 온 동내에 연주하면서, 어깨동무하고 나비를 잡으러 뛰어다닌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에도 모처럼, 정말 모처럼 따뜻한 햇살이 들었을 게다.

그리하여 마침내 내가 살고 있는 금호강 가에도 봄이 돌아왔다. 산수유와 매화는 이미 꽃망울을 터뜨렸다. 살구꽃과 복사꽃도 대기발령을 받고 언제든지 한바탕 광란의 축제를 벌일 태세다. 그러나 벌써 열흘 째 온천지를 뒤덮은 미증유 파천황의 미세 먼지로 봄이 와도 봄이 아니다. 강변에는 개는 물론이고 개가 끌고 다니는 사람조차도 검은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 이러다가 몇 년 뒤에는 아이들이 방독면을 쓰고, 방독면 쓴 나비를 잡으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무서운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까, 겁이 덜컥 나는 봄날이다, 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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