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계의창] 전두환은 역사에 독재자로 남기를 원하는가

채형복 경북대 로스쿨 교수
채형복 경북대 로스쿨 교수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돼

광주지법에 출두한 前 대통령

시민들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며

끝내 한마디 사과나 사죄 않아

지난 11일 고(故)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전두환이 광주지법에 출두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불현듯 유학 시절 프랑스 TV 뉴스에서 본 화제의 인물이 떠올랐다. 모리스 파퐁. 그는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로 1997년 87세의 나이로 법정에 섰고, 그 이듬해 반인도적 범죄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반민특위가 무산됨으로써 일제 부역자를 척결하지 못한 우리와는 달리 전후 프랑스 정부는 철저하게 나치 부역자를 척결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파퐁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그 이유는 바로 그의 '기회주의적인 변신 능력' 덕분이다.

파퐁은 비시 정부에서 유대인을 포로수용소로 보내는 업무를 맡아 나치에 적극 협력하였다. 그러다 독일의 패전이 가시화되자 레지스탕스에 나치의 활동을 보고하였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샤를 드골 정권 아래서 파리 경찰국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쳐 재무부 장관까지 지냈다. 1962년에는 프랑스 정부가 수여하는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까지 받았으나 1998년 그가 반인도적 범죄로 실형을 선고받으면서 이 훈장은 박탈되었다. 2002년 파퐁은 질병을 이유로 석방되었고, 2007년 사망하였다. 파퐁 측은 훈장과 함께 그를 무덤에 안장하겠다고 발표하였다. 프랑스 정계와 시민단체들은 파렴치한 행위라며 강력하게 규탄하였지만 이를 막을 수는 없었다.

1995년 12월 21일 검찰은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군형법상 반란수괴 등 혐의로 기소했고, 이어 5'18 내란사건에 대해서도 추가 기소하여 재판에 넘겼다. 1997년 4월 대법원은 2심 재판부가 전두환에게 내린 무기징역과 추징금 2천205억원을 확정했다. 1997년 12월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그를 특별 사면했다.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재임 중 조성한 불법비자금은 무려 1조원으로 추정된다. 검찰이 자신을 기소하자 그는 "가진 재산은 국가를 위해 헌납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정작 법원이 추징금을 확정하자 전두환은 자신이 가진 전 재산은 '29만원뿐'이라고 발뺌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기염을 토하게 만들었다. 검찰에 따르면, 현재 추징금 총 2천205억원 중 53.5%에 해당하는 1천175억원가량만을 확보했다고 한다. 아직 1천30억원에 달하는 금액이 남아있는 셈인데, 추징금 환수는 22년째 진행 중이다.

전두환의 안하무인식 모르쇠 전략은 광주지법 출석 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발포 명령을 부인하십니까"라는 어느 취재진의 질문에 그는 "이거 왜 이래"라며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전두환은 사과하라"고 절규하는 광주시민들에게 사과는커녕 그저 그들을 무표정한 모습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이날 어른들의 가슴을 가장 아프게 하면서도 부끄럽게 만든 광경은 광주지법 맞은편에 있는 초등학교 학생들의 모습이었다.

어린 학생들은 교실 창문을 통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전두환은 사과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전두환은 5'18의 영령과 시민들 앞에 끝내 한마디의 사과나 사죄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변호사에게 모든 답변을 내맡기고 마치 남의 일인 듯 재판 중에 꾸벅꾸벅 졸기까지 하였다.

프랑스 작가 아네트 레비-윌라르는 파퐁의 죽음을 맞아 아래 제목으로 일간지 '리베라시옹'에 그의 삶을 평가하는 글을 썼다.

"존경스럽도록 치졸한 자의 기나긴 생애."(La si longue carriere dun salaud respectable)

전두환에게 이보다 딱 들어맞는 말이 있을까. 앞으로는 그는 얼마나 더 존경스럽도록 치졸한 삶에 연연하며 구차한 목숨을 연명할 것인가. 그에게 묻고 싶다. 정녕 조국을 위해 목숨 마친 명예로운 군인이 아니라 국민을 학살한 독재자로 역사에 남고자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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