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전시장과 화가의 화실은 신문사 미술담당 기자의 주된 출입처이다. 전시장이 동시대 미술 경향과 미술인들과의 교류 및 동향을 알 수 있는 장소라면, 화실은 개별 화가들의 삶과 작업형태를 엿볼 수 있는 창구이기 때문이다.
목련 산수유 개나리가 다투어 꽃망울을 터뜨리는 이른 봄날의 오후. 한국화가 남학호(60)가 20년째 둥지를 틀고 있는 화실을 찾았다. 132㎡(40평) 남짓한 화실 복판을 가득 채운 엄청나게 넓은 캔버스를 꽉 메운 조약돌 그림이 아무 생각 없이 들른 객을 마치 바닷가 자갈해변으로 순간 이동시켜 놓은 듯 했다. 가로 8m에 세로 2m. 1천200호짜리 미완성의 초대작 '石心(생명)'이 안겨준 찰나적 충격이었다.
◆왜 이런 초대작을 작업하는가
"황금돼지해인 올해로 제가 이순(耳順)이 됐습니다. 화업 40년을 맞아 배우고 익혔던 조형관, 화가로서 가치관을 포함해 어찌 보면 각고의 시기이기도 했던 세월의 결과물을 구상해 보고 싶었죠." 남 화백은 1980년대부터 40여 년간 조약돌을 그려왔다. 이름 하여 '석심'시리즈인 조약돌 그림은 지금까지 200여점을 그렸다. 최근엔 주로 100호 이상 400호 600호 800호 등 대작에 매진해왔다.
"이 작품을 보고 주변에서는 '주문 받았냐'는 말을 많이 들었죠. 하지만 예술가는 공산품 제작자가 아닙니다. 그냥 화가로서 내가 좋아하는 사물을 나의 미학관에 비추어 창작할 뿐이죠. 작품을 그릴 때마다 캔버스 속 화법과 오브제의 마음을 느끼고자 합니다."
◆조약돌에 애착을 갖는 이유는
"내 예술 감성의 원천은 고향이기 때문이죠. 영덕군 병곡리는 칠보산과 송천강, 고래불해수욕장이 어우러진 천혜의 자연환경을 자랑합니다. 어린 시절 그곳에서 멱을 감고 고기를 잡으며 느낀 산과 강, 바다의 경계에서 능선과 물의 유연함을 일깨웠고, 넓게 펼쳐진 조약돌 해안은 40년 내 그림의 바탕이 된 돌의 미학을 내 의식에 각인시켜 준 것이죠. 고향이 곧 천연의 스승인 셈이죠."
조부는 유학자였고 아버지는 면의 공무원으로 마을 대소사를 도맡으면서 남 화백은 어려서부터 먹(墨)갈기에 익숙했고 때문에 일찍부터 묵향을 맡았다. 이런 그에게 바닷가 조약돌은 자연의 예술품으로써 무척이나 인상적이었고, 따라서 화폭에 옮기고 싶은 충동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화가의 삶을 돌이켜 본다면
"내가 과연 화가로서 자질이 있는가에 대한 스스로의 질문 탓에 잠을 이루지 못한 밤도 많았죠. 일정 수준까지 실력을 갖추기까지의 시간이 힘들었고 재능 있는 동료화가를 멘토로 삼아 그림 실력을 닦아오기도 했죠."
남 화백은 대가의 능력에 미치지 못해 좌절도 겪었고 뛰어난 동료화가를 볼 때면 질투심도 생겼다고 고백했다. 어찌 보면 자신만의 조형적 철학을 위해 숱한 밤을 노력한 '인간적 화가'이다. 그러나 좌절과 위축이 찾아 올 때마다 '나만의 그림 특색'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이런 노력이 좌절을 이겨낸 힘이 되기도 했다.
"남들이 쉽게 하지 않은 것을 함으로써 남학호라는 화가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그가 "예술가도 하나의 직업이다"는 모토 아래 매일 하루 8시간씩 붓을 놓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회구성원으로서 책임을 다하려는 것. 이게 그의 삶의 태도이다.
◆노력하는 자에게 기회가…
주로 화선지에 화조도 같은 수묵한국화에 천착하고 있던 그에게 화가로서 전환기를 맞은 것은 1980년대 중반 불어 닥친 미술계의 장르파괴 바람이었다.
그때까지 선과 여백을 중시했던 한국화풍에서 명암과 면을 중시하는 서양화풍을 도입한 그는 수묵의 세계와 색채의 세계를 오가며 조형미를 살려냈고 그 출발점으로 '석심'시리즈를 창작해내기 시작했다.
"동양과 서양의 기법이 섞이면서 나의 조형언어도 훨씬 풍부해졌고 그 결과가 이번의 1,200호짜리 '석심'시리즈 대작이라고 할 수 있죠."
남학호 '석심'시리즈의 특징은 화면 가득한 조약돌 그림에 언제나 작은 나비나 하트 그림이 비밀 기호처럼 숨겨져 있다. 그는 '돌'을 통해 존재의 무거움을, '나비'나 '하트'를 통해 그 가벼움을 유비시키면서 만물이 유기적임을 구성하고 있다. '돌'은 지상 또는 현실이며 '나비'와 '하트'는 하늘 또는 꿈인 셈이다. 이러한 그의 의식 밑에는 젊은 날 갑자기 세상과 이별한 아내의 죽음을 환유하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오는 6월쯤이면 1,200호짜리 대작이 완성됩니다. 10월에 있을 대구문화예술회관의 중견작가 5인 초대전에 이 작품과 더불어 10여점의 '석심' 시리즈를 선보일 예정이며 이어서 11월에는 수성아트피아 호반갤러리에서 또한 초대전이 열립니다. 두 개의 초대전에 중복작품은 없습니다."
한국화가 남학호. 그의 바람은 한국미술계에서 독보적인 '조약돌 화가'로 남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나에게 그림은 종교입니다. 아니 삶 그 자체이죠. 나는 숟갈처럼 붓을 들고 밥처럼 색채를 떠먹습니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의 화실 당호가 '돌을 가까이 한다'는 근석당(近石堂)임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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