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장] 왜 팔공산인가?

전영권 대구가톨릭대 지리교육과 교수

전영권 대구가톨릭대 지리교육과 교수
전영권 대구가톨릭대 지리교육과 교수

팔공산 지명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고문헌은 '점필재집'이다. '점필재집'은 김종직의 시문집으로 김종직 사후(死後) 5년째인 1497년에 간행되었다. 팔공산 지명은 '점필재집' 제7권 '시편'에 수록된 한시 '범어역 노상에서 보고 느낀 것을 적는다'(凡於驛路上記所見)의 내용 중 '팔공산 아래는 의당 가을이 아니로구나'(八公山下不宜秋)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팔공산은 중악(中岳), 부악(父岳), 공산(公山) 등으로 불려져 왔다. 중악의 기원은 '삼국사기' 권 제32 '잡지' (雜志)의 '제사(祭祀)와 樂(악)'에 잘 나타난다. "3산(山)·5악(岳) 이하 명산대천을 나누어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로 구분하고, 그중에 중사는 5악으로 동악을 대성군의 토함산(吐含山), 남악을 청주(菁州)의 지리산(地理山), 서악을 웅천주(熊川州)의 계룡산(鷄龍山), 북악을 내사군(奈巳郡)의 태백산(太伯山), 중악을 동·서·남·북악의 중간에 위치하는 압독군(押督郡)의 공산(公山)으로 한다."

이처럼 팔공산은 신라시대 이래 중악, 부악, 공산 등으로 불려져 오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비로소 팔공산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다. 팔공산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먼저 8개 고을에 걸쳐 있는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그러나 팔공산이 행정구역상으로 8개 지역에 걸쳐 분포한 적은 없다.

둘째, 동화사 창건 설화에 나오는 팔간자설이다. 조선시대는 '숭유억불'의 이념체계를 지향하던 시대다. 따라서 불교와 관련된 팔간자의 '팔'(八)을 차용하여 공산을 팔공산으로 개칭했을 리는 없다.

셋째,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 견훤 간에 벌어진 팔공산의 공산전투에서 왕건이 크게 패하여 도주할 때, 왕건의 여덟 장수가 팔공산에서 순절했다는 것에서 유래한다는 설이다. 그러나 공산전투에서 왕건과 함께 전투를 하다 순절한 장수로는 신숭겸과 김락 두 명이다. 그래서 고려 예종은 두 장수의 원혼을 달래주려고 '도이장가'를 짓기도 했다.

넷째, 중국 지명을 차용했다는 설이다. 사대부의 중국에 대한 모화(慕華)사상이 강했던 조선시대에는 중국 지명을 차용한 경우가 많았다. 383년 전진(前秦)과 동진(東晋) 간에 벌어진 비수전투의 격전지에는 팔공산(八公山)이라는 지명이 존재한다. 아마도 당시 비수전투가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 견훤 간에 벌어진 공산전투만큼이나 치열했던 탓에 팔공산 지명이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팔공산의 지명 유래에 대한 설이 다양하게 전해오고 있으나 가장 합리적인 유래설은 중국 안휘성(安徽省)의 팔공산 지명 차용설이라 생각된다. 팔공산은 전라북도에도 한자어까지 동일한 지명이 존재한다. 섬진강 발원지로 진안군과 장수군에 걸쳐 있는 해발 1,151m에 달하는 높은 산이다. 즉 한자어까지 동일한 지명이 2곳에 존재한다는 것은 특정 지명을 차용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능케 해준다.

조선시대에 제·개정된 지명 대부분이 중국의 영향을 받았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제 팔공산 지명의 중국 유래설을 중국 관광객 유치에 활용해보면 어떨까? 중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가 재물과 관련된 '8'(八)이고, 정성껏 기도하면 한 번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갓바위가 있는 팔공산은 중화권 관광객에게는 엄청난 매력으로 다가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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