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트 이스트우드. 얼마나 가슴 설레게 하는 이름인가. 1970년 사보이극장에서 '켈리의 영웅들'(1970)을 본 이후 50년간 스크린에서 그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는 이탈리아산 서부영화 마카로니 웨스턴의 히어로였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황야의 무법자'(1964) 삼부작에서 찡그린 얼굴로 궐련을 돌려 씹던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그 모습을 연상하고 만경관에서 '평원의 무법자'(1973)를 두근거리며 봤지만 '어라! 이거 뭐지?'라며 의아해했던 기억도 있다. 평원의 아지랑이 속에서 나타난 건맨. 총잡이들을 죽이지만, 멋은 없고, 악당 또한 혐오스럽지가 않았다. 심지어 채찍을 맞으며 고통스러워 하니 무법자의 체통이 말이 아니었다. 죽은 보안관 묘비 앞에서 누가 그의 이름을 묻자 "이미 내 이름을 알고 있지 않느냐"며 아지랑이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죽은 보안관의 유령인가?
'평원의 무법자'는 그가 감독한 영화다. 선과 악의 구분이 없는 냉혹한 서부 시대의 변형된 인물 '빌 머니'(용서받지 못한자)는 이미 이때 그의 관념 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터티 해리'(1971) 시리즈를 비롯해 영화 속 이미지는 히어로지만 그가 연출한 영화들은 늘 그 반대에서 반영웅적 인간의 고뇌를 담아내려고 했다.
'그랜 토리노'(2008)의 신경질적인 노인 참전 군인의 회한은 그의 이상과 현실의 부조화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지난주 개봉된 '라스트 미션'(2018)은 10년의 시간차를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좀 더 친절하게 호소하고 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 얼 스톤(클린트 이스트우드). 그는 백합을 키우는 원예사로 세인의 존경을 받는다. 그러나 워낙 가정을 등한시해서 아내와 딸은 그로 인해 늘 무시당하고 상처를 받는다. 학예회와 입학, 졸업식, 결혼기념일 등 가족이 함께 하는 순간에 자리를 함께 한 적이 없다. 딸은 12년간 그와 말을 섞지 않고 돌아서 버리고, 아내도 진절머리를 낸다.
가족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던 사업이 인터넷으로 파산하고, 그는 갈 곳마저 잃어버린다. 농장은 차압되고 남은 것은 낡은 포드 픽업트럭. 녹이 슬고 시동도 늦고, 소음만 큰 것이 영락없는 자신의 몰골이다.
우연한 기회에 배달 일을 맡는다. 미국 50개 주를 안 다녀본 적이 없기에 배달은 그에게 수월한 일이다. 그런데 수임료가 지나치게 많다. 배달 물건이 마약이었던 것이다. 뒤늦게 알지만 가족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무엇보다 돈이 절실했던 그는 그 미션을 계속한다.
'라스트 미션'의 원제는 노새라는 뜻의 'The Mule'이다. 마약 배달원의 또 다른 이름으로 멕시코 시날로아 카르텔에 속했던 87세의 레오 샤프라는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다. 지난해 89세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동시대를 호흡했기에 싱크로율은 만점이다.
10년의 세월이 흐른 탓일까. '그랜 토리노' 때 보다 어깨는 더욱 굽었고, 피부는 쭈글쭈글해졌고, 걸음걸이도 힘을 잃었다. 바지는 헐렁하고, 머리는 백발에 꺽다리 할배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조롱과 힐난은 여전하고, 시니컬한 표정에 세상사 마뜩잖은 듯한 눈빛은 살아서 번득인다.
실제로 쓸 수 없는 니그로(흑인), 레즈(여성 동성애자)를 내뱉고, "젊은 것들은 인터넷이 없으면 박스 하나도 못 연다."면서 경멸한다. 카르텔 두목에게도 "사람을 얼마나 죽이면 이런 집을 살 수 있느냐?"는 말도 서슴지 않고 던진다. 늙음이 주는 미덕일까.
세상의 끝에 선 얼 스톤이 절실하게 깨달은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가족에게 돌아가고픈 절실함이다. 못난 아빠, 무책임한 남편이 아닌 가족으로 재회하고 화해하는 것이다. 마약으로 목돈이 들어오지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시간이다. 그나마 그 시간이 그리 많지도 않다는 회한이 그를 엄습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래도 삶을 즐거운 것. 목숨을 내놓아야 할 빠듯한 미션에 그는 먹고 싶은 것 먹고, 젊은 여인들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마약을 배달하면서도 그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목청껏 부르며 일상을 자적한다.
재즈에 심취해 1940년대 색소폰 제왕 찰리 파커의 삶을 영화('버드')로 만들었던 이스트우드의 음악에 대한 조예는 빼어난 OST로 귀를 즐겁게 한다. 엔드 크레딧 순간에도 쉽게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
워낙 이스트우드의 비중이 큰 탓에 다른 연기자들은 카메오 수준. 그래도 비중 있는 배우들이 출연한다. 앤디 가르시아가 카르텔 보스로, 로렌스 피시번과 브래들리 쿠퍼가 마약단속국 요원으로 나온다. '한나와 그 자매들'(1986)과 '브로드웨이를 쏴라'(1994)로 두 번이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다이앤 위스트가 아내로, 이스트우드의 친딸인 앨리슨이 극 중 딸로 출연한다.
'라스트 미션'은 이스트우드 60년 영화인생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며 한국에서 지은 제목이다. '노새' 보다는 훨씬 그럴듯하지만, 그래도 마지막이라니.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다음 영화가 보고 싶다. 더티 해리가 백합을 심는다면, 그다음이 궁금하지 않은가?
김중기 문화공간 필름통 대표 filmt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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