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먼지 때문인지 가슴이 답답하다. 며칠 쾌청한 하늘이 마음을 들뜨게 하더니 다시 시야가 어두워진다. 때맞춰 세상일이 성에 차지 않던 이들은 미세먼지를 빌미로 누군가를 탓하고 꾸짖는다. '이웃 나라가 문제다'로 시작해서 '정부 대응이 엉망이다'까지 힐난의 목소리는 다양한데, 사실 그다지 공감 가지는 않는다. 그 많은 비난과 비평 속에 유독 '내 탓'은 빠져 있기 때문이다.
미세먼지는 답답하지만 큰 디젤 SUV는 몰고 다녀야 하고, 환경은 걱정되지만 소비는 멈출 수 없는 욕망의 전성시대다. 제철도 아닌 음식을 먹겠다고 화학비료와 비닐을 땅에 퍼부어 대고, 부화한 지 두 달도 되지 않는 어린 닭을 공장식 축산으로 살찌워 도축하는 탐욕의 일상을 살면서 국제 관계와 국가 정책을 탓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가. 내가 실천하고 바뀔 것은 하나도 없고 오로지 남 탓만 하면 되는 편리함은 또 얼마나 유혹적인가. 여전히 공사판은 벌어져야 하고, 에너지 과소비는 지속되어야 하며, 마음껏 '쓰면서' 살기를 바라는 동시에 환경은 좋아져야 한다는 이율배반을 남 탓으로 돌리는 것만큼 편리한 해법이 또 있겠는가.
가톨릭교회가 지금 보내고 있는 사순 시기는 부활절의 영광에 앞서 삶의 태도를 전환하는 회개의 때다. 전통적으로 유대-그리스도교 문화에서 회개의 때를 보내는 방법은 기도와 단식과 자선이었다.
우선 기도는 차안대(遮眼帶)를 끼고 달려가는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치닫던 시야를 넓히는 일이다. 머리 위로 하늘을 우러르고 아래로 땅을 굽어보는 넓은 시야는 욕망의 굴레에 매인 자신의 한계를 바로 보게 한다. 또 단식은 욕망을 어르고 다스려 일상 속에 덕지덕지 붙은 군살들을 떼어내는 일이다. 없으면 안 될 것 같았던 것들도 결국 '흙으로 돌아갈'(창세 3, 19 참조) 것이고, 판매대 위에서 자태를 뽐내던 '신상'과 새롭게 열었다는 '맛집'도 결국 거기서 거기일 뿐이다.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코헬 1, 9)
기도와 단식을 통해 달뜬 욕망을 가라앉힌 사람은 옆을 돌아보게 된다. 내 욕망에 눈이 멀어 있던 동안 보이지 않던 형제의 고통과 수난이 말을 건넨다. '보라, 이 고통 속에 구세주가 계신다.' 그리하여 사람은 자신의 것을 나누기 시작한다. 자선의 시작이다.
이렇게 기도와 단식과 자선을 통해 세상의 십자가를 함께 지는 사람은 고통의 의미를 재발견한다. 욕망이 가렸던 삶의 진실, 그러니까 세상의 악과 고통에 자신도 한몫하고 있으며 이 악과 고통은 내 욕망을 다스리고 변화시키는 회개 없이는 나아지지 않는다는 진실을 알아보게 된다. "제 탓이오, 제 탓이오, 저의 큰 탓이옵니다"라고 고백하며 제 가슴을 두드릴 줄 알게 되는 것이다.
물론 환경 문제 같은 광범위한 문제가 개개인의 각성과 윤리적 실천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법과 국가 정책 같은 제도적 장치와 사회윤리가 존재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어떠한 제도적 개선도 개개인의 책임과 무관하지 않다. "제 탓이오"를 외면하고 '남 탓'만 하는 것은 위선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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