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영재의 대구음악유사]메리 크리스마스

전 대구적십자병원 원장

해방 다음해 10월 1일 대구에 폭동 사건이 일어났다. 대부분 공산당원인 폭도들이 공무원들이 쌀을 다 먹는 바람에 시민들이 굶어 죽게 되었다며 난동을 일으켰다. 재물을 부수고 사람을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칼로 도려내는 피의 난동은 대구 시내에서 시작되어 경북도로 이윽고는 남쪽지방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남로당의 적화 혁명 시도는 이렇게 시작되었고 6.25사변으로 이어지게 된다.

힘없는 시민들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희망 없는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고통의 동토(凍土)에 위안의 날이 생겼으니 크리스마스다. 해방 후 미국 군정 때 크리스마스가 휴일로 정해지고 1948년 이승만 대통령은 12월 25일을 '기독탄생일'이라는 이름으로 정식 법정 공휴일로 지정한다. 일반인들은 이 날을 '성탄절'이나 '크리스마스'로 부르고 선물용 카드 같은 데서는XPIΣTOΣ(그리스 말로 크리스토스)의 준말인 X-mas라고 많이 쓴다. 그리스도(Christ)의 미사(Mass)라는 뜻이다.

천주교에서는 '주님 성탄대축일'이라고 쓴다. 예수님이 12월 25일 이 땅에 오셨다는 말은 근거 없는 소리다. 성경에도 없고 어디에도 그런 말은 없다. 아무도 예수님이 태어난 날을 모른다. 봄의 어떤 날이라는 말도 있고 1월 7일(유럽 성공회)이라고 하는 곳도 있다. 날짜가 지금처럼 정해진 내력은 초대 교회 때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메시아 잉태한 날과 사망일이 같다는 것을 바탕으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3월 25일에 임신기간 9개월을 더해서 12월 25일이 생일 날로 정해지게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우리는 학자들이 아니므로 예수님이 언제 탄생했는지는 크게 관심이 없다. 다만 훌륭한 어른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이 기쁘고 행복할 따름이다. 한반도의 민초(民草)가 해방, 전쟁 등 혼란과 고통의 바다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 크리스마스는 가뭄의 단비였다. 이 날은 신성한 성인의 생일인데다가 통행금지가 없는 자유의 밤까지 주어지니 예수교 신자이든 아니든 온 국민에게 이 날은 축제의 날이 되는 것이다. 큰 잔치에는 불청객이 자주 끼어들 듯 난데없이 산타클로스가 사슴타고 나타나 선물을 뿌리니 축제가 더욱 풍성해진다. 이 양반은 예수 탄생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터키 지역 대주교로 '성 니콜라우스'라고 불리던 사람이다. 성 니콜라우스는 네덜란드어로 '신테르클라스'라고 하는데 이 게 오늘 날의 산타클로스의 어원이 된다.

이렇게 루돌프 사슴타고 오는 복덩이 영감과 미국 군인들이 교회나 자선단체를 통해 먹을 것, 입을 것, 놀 것 등을 제공하니까 크리스마스는 풍성하고 즐거운 날, 희망의 날이 되는 것이었다. 크리스마스 무렵에 동성로, 향촌동에는 캐럴이 요란하고 청춘 남여의 흐름이 홍수처럼 넘쳐흘렀다. 동네마다 있던 전파사에서는 11월부터 크리스마스 캐럴을 틀기 시작해서 1월 말까지 굉음(轟音)을 질러대었다.

나라의 곳간이 차게 되자 외국인들이 주던 과자, 옷가지, 장난감 등의 구제품이 시시하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그들도 더 이상 주지 않았다. 통행금지도 전면 폐지되었다. 1975년 1월 15일 용태영 변호사의 분투로 석가탄신일이 법정공휴일로 정해지면서 크리스마스의 희소성을 희석시켰다. 연말만 되면 그렇게 오래 동안 골목을 떠들썩하게 하던 소음성 캐럴이 없어졌다. 젊은이들의 올 나이트도 없어지고 동성로의 뿔피리도 없어졌다. 사는 게 각박해서 마음이 허전한 날엔 루돌프 탄 산타가 보이고 귀에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부르는 빙 크로비의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 잊힌 그 환각이 그나마 구겨진 희망을 잠시나마 되살려 줄 뿐이다.

전 대구적십자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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