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때가 되면 벚꽃이 피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기자는 30년 넘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뒤편 퍼걸러 옆에는 오래된 벚나무 한 그루가 있다. 비흡연자에게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곳은 기자의 흡연 장소다. 퍼걸러에 앉아 담배 한 대 물고 벚꽃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은 다시 없는 즐거움이다.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을 보기 위해 1년을 기다렸건만,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1주일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개화를 기다리고 있지만, '일본에서 유래된 꽃'이라 마음 한쪽에 찜찜함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저어하는 '친일'(親日)의 원죄 의식을 완전히 걷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벚꽃을 위한 변명 아닌 변명을 하자면 벚꽃도 군국주의의 희생자다. 벚꽃은 그저 아름다운 꽃일 뿐, 사무라이 정신과 군국주의와는 연관이 없었다. '보이는 곳/ 마음 닿는 곳마다/ 올해의 첫 벚꽃.' '밤에 핀 벚꽃/ 오늘 또한/ 옛날이 되어 버렸네,' 에도시대 하이쿠(俳句단시)에서 보듯, 서민들이 좋아하는 밝은 이미지의 꽃이었다.
1930년대 군국주의 광풍이 불면서 벚꽃은 일왕과 국가를 위해 아름답게 희생하는 상징이 됐다. '흩어지고 흩어진다고 해도/ 꽃의 고향 야스쿠니신사/ 봄의 가지에 피어 만나자'〈동기(同期)의 벚꽃〉.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원들이 출전을 앞두고 부른 군가다. 군국주의자들이 국민들을 죽음으로 내몰기 위해 벚꽃의 특성을 이용한 것이다.
일본 영화·애니메이션에는 사무라이가 꽃비를 맞으며 할복하는 장면이 자주 나오지만, 이것도 허구다. "일본에는 '꽃은 벚꽃, 사람은 무사'란 말이 있다. '꽃은 질 때 산산이 흩날리는 벚꽃이 아름답고 사람은 벚꽃처럼 죽을 때가 아름다워야 가장 훌륭한 무사'라는 말이다. 무사들의 미학이다. 여기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다. 꽃잎이 한꺼번에 떨어지는 벚꽃은 왕벚나무다. 무사들이 한창 활동하던 시기에는 왕벚나무가 흔치 않았다. 이 감상은 왕벚나무가 보급된 후에 '연출된 것'이다."〈이나가키 히데히로, 식물도시 에도의 탄생〉
부언하면 이 책의 왕벚나무는 소메이요시노(染井吉野)다. 이 수종은 에도시대 말기에 출현해 메이지시대 이후 일본 각지로 퍼졌고, 오늘날 일본 벚나무의 80% 이상을 차지한다. 오히려 에도시대에는 순식간에 지는 특성 때문에 가문이 오래 지속되지 않을까 싶어 벚꽃을 가문의 문양으로 삼은 무가도 없었다.
벚꽃의 굴곡진 역사를 장황하게 설명한 이유는 요즘 우리 것만 내세우고 남의 것은 인정하지 않는 극단적인 민족주의가 횡행하는 탓이다. 현 정권에 반대하거나 일본·미국을 두둔하면 '매국노' '친일극우세력' '토착왜구'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분위기다. 물론,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반민특위' 발언은 무지의 소치이니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정권 차원에서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극히 위험하다. 해방 7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대통령이 '친일 잔재 청산' '민족정기'를 운운하니 허탈한 느낌마저 있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외교를 챙기고 국민통합에 나서야 할 대통령이 앞세울 구호는 아니다. 국민이 실력을 키워야 '극일'이 가능하지, 시대에 뒤처진 '구호정치'는 한국의 고립만 부를 뿐이다. 박근혜 정권도 국사 교과서에 손대려다 파국을 맞은 전례가 있듯, 역사를 정치에 이용해선 안 된다.
시절이 하수상한 탓에 벚꽃을 좋아한다고 '친일파'로 몰리지 않을까 하고 살짝 고민하지만, 1년 만의 호사인지라 꿋꿋하게 즐기겠다. 늘 인간이 문제이지, 자연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글로벌 시대에 원산지가 일본이면 어떻고, 미국이면 어떤가.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탄핵안 줄기각'에 민주 "예상 못했다…인용 가능성 높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