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루이 다비드, '레꺄미에 부인의 초상', 174 x 224cm, 캔버스에 유채, 1800, 루브르박물관 소장
완성이 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도 루브르박물관에서 관객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그림이 있다. 미완의 미학으로 남은 '레꺄미에 부인의 초상'은 프랑스 신고전주의 화풍을 정착시킨 자크ㅡ루이 다비드(1748~1825)가 그린 유일한 여인초상화이다. 인물의 본질을 절묘하게 포착한 이 그림은 미완성 상태로도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인다.
다비드는 왕정을 없애고 시민들에 의한 공화정 수립을 외친 프랑스대혁명(1789)에 동조했다. 그는 고대로마에서 차용한 주제로 당대의 영웅주의와 시민의 덕목을 강조한 작품들을 통해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보여주었다. 혼란의 도가니였던 혁명과도기 파리는 1799년, 쿠데타로 집권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일상의 평온을 되찾은 분위기였다. '레꺄미에 부인의 초상'은 특이하게 주로 역사화에 사용된 가로로 긴 캔버스에 그려져 있다. 모델은 비스듬히 '메리디엔'으로 불린 휴식용 의자에 다리를 펴고 쿠션에 기대고 앉아서 얼굴은 정면으로 관객을 향하고 있다. 응시하는 눈빛과, 당시로선 과감하게 맨발을 드러낸 그녀는 도발적인 동시에 여신 같은 고귀함, 즉 현실과 이상이 결합된 독특함으로 빛난다. 다비드는 모델의 자세를 메디치 가문의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줄리아노 메디치'의 묘비상 중 '낮'을 의인화한 조각상에서 따왔다.
수직으로 뻗은 램프와 수평으로 긴 의자가 만드는 엄격한 구도, 지극히 간결하게 처리된 배경은 우아한 모델에 시선이 집중되도록 유도한다. 왼쪽 램프 윗부분에서부터 대각선으로 모델의 몸과 드레스의 곡선이 부드럽게 흐르며 전체적으로 딱딱함 속에서도 유연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당시 23살인 쥘리에트 레꺄미에(1777~1849)는 파리 사교계의 스타이자 패션리더였다. 미모와 지성, 부를 갖춘 그녀의 대저택 살롱에 모인 발자크, 샤토브리앙 등 기라성 같은 문인들과 정치인, 예술가들은 그녀를 숭배했다. 이 그림이 그려진 1800년은 남편인 자크 레꺄미에가 프랑스은행 총재가 돼 부부의 명예와 부가 정점에 도달한 시기였다. 세련된 취향의 쥘리에트는 쿠데타 이후 귀족계층을 대신하는 새로운 지배계층이 된 대부르주와, 다시 말해 사회적 신분상승을 상징한다.
혁명 전의 사치스럽고 화려한 로코코 스타일 대신 쥘리에트는 심플한 고대 그리스식 옷을 입고 있고, 짧은 머리엔 그리스 여신들의 머리장식 밴드를 둘렀다. 흔한 목걸이나 팔찌 하나 없는 그녀는 혁명시기 파리의 험난했던 삶을 치유하듯 무거운 치장을 들어내고 가벼움과 자유로움을 표방하는 듯하다. 당시엔 몸의 곡선을 따라 흘러내리는 얇은 드레스가 유행하는 바람에 겨울에도 이렇게 입다가 폐렴에 걸린 여성이 많았다고 한다. J. 쟈콥이 디자인한 에트루리아식 긴 의자, 폼페이식 램프 등은 1800~1830년 사이 프랑스를 비롯해 전 유럽으로 확산된 '제국양식'의 전형이다.
리옹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쥘리에트는 당시 관습대로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고, 15세에 부친의 친구인 은행가와 결혼해서 파리에 정착했다. 이 부부는 평생 다정하면서도 플라토닉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이전 왕정시기부터도 10대에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해서 나중에 젊은 애인을 두는 건 흔한 일이었다. 쥘리에트도 1807년에 프러시아의 오거스트 왕자를 만난다. 이 둘이 교환한 연서들은 현재 파리의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레꺄미에 부인의 초상'에서 유일하게 완성된 부분은 얼굴이다. 왜 이 그림이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을까? 쥘리에트는 다비드의 모델이 되기엔 참을성이 부족했다. 그림이 빨리 완성되지 않자 그녀는 다비드의 제자인 프랑수와 제라르에게도 자신의 초상화를 부탁하였다. 자존심이 상한 다비드는 이렇게 대응했다. "부인, 여자들이 그들만의 변덕이 있듯이 화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예술가의 기대치에 부합하기 위해 지금 이 상태로 그림을 두겠습니다." 그림값을 못 받을지언정 다비드는 작가의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궁정화가로 황제의 권위를 강조한 여러 점의 작품을 남겼지만, 결코 어용화가는 아니었다. 나폴레옹 실각 후 벨기에 브뤼셀로 망명해서 향수병으로 고통을 받았지만 왕정복고 정부가 보낸 수차례의 러브콜을 거절하고 정치적 기회주의자가 되길 거부하며 쓸쓸히 타지에서 죽음을 맞았다.
박소영(전시기획자, PK Art & Media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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