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전셋값 대느라 헉헉거리는데, 누구는 아파트값이 몇 배로 뛰며 돈방석에 앉고…. 초식동물로 살아가는 비애는 도대체 나에게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낳게 한다."
청와대 대변인 김의겸은 물러났지만, 그가 남긴 말의 여운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가 한겨레신문 기자이던 2011년 썼다는 이 칼럼은 묘하게 문재인 정부의 본성과 잘 버무려지고 있다. '이게 나라냐'라고 외친 촛불 시위로 생겨난 문재인 정부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가진 김의겸. 이들의 국가관은 데칼코마니다.
그래서 김의겸 사태는 이 정부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본다. 청와대에 와 보니 국가란 믿을 수 없고, 결국 내가 알아서 부동산 투기하고 노후 대책을 꾸려야 한다는 냉정한 현실을 본 것이다. 운동권 세력은 국가가 언제나 돈을 뿌려줄 것이라는 환상을 유포해왔다. 김의겸은 그런 환상으로 가득한 문재인 정부의 정책이 잘못됐음을 몸으로 말하고 있다.
더 이상 문재인 정부에 속지 말라고. '이게 나라다'가 아니라 '이게 나다'라고 외치는 것 같다. 환상의 국가는 없었고, 김의겸을 기득권으로 만들어주는 정부만 있었던 것이다. 알았으면 털어먹어야 한다.
이 정부가 이대로 끝나게 된다면 우리 국민은 집단 패닉에 빠져들지도 모른다. '이게 나라냐'라고 외친 한 무리가 나타나 '이게 나라다'를 보여주기는커녕, 입술에 핏자국도 닦지 않은 채 한탕 해 먹고 사라지는 최악의 육식동물임을 목도하고 있는 건 아닐까. 대국민 사기극 말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우선 오만과 부도덕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2년 전 취임사에서 "잘못한 일은 잘못했다고 말씀드리겠다"고 말했다. 이것만 지켰어도 악성 종양은 더 번지지 않았다. 김의겸은 떠날 때까지 고개를 바짝 세웠고, 장관 후보자 낙마를 설명하는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끝까지 '무슨 문제냐'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대구 칠성시장에서 경호원이 총기를 노출해도 "과거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도 그랬다"고 변명했다. 불리하면 전 정부가 했다고 한다. 한미동맹을 흔들어대는 이 정부에서 장관 후보자들이 줄줄이 자식을 미국에 유학 보내는 기득권의 이중인격을 유행시키고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적폐의 무덤 위에서 탄생한 정부라면 도덕 기준을 더 높여야 할 텐데 온통 전임 정부 탓이거나 세상 탓이다. 청년대표는 청년 정책을 하소연할 곳이 없다면서 대통령 앞에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절벽 정부다.
오만의 배후에는 비뚤어진 운동권적 선민의식이 있다. 이들이 과도하게 도덕적 우월주의를 내세울 때 크게 불안했었다. 김의겸은 문재인 정부에는 민간인 사찰의 DNA가 없다든가, 블랙리스트의 딱지를 갖다 붙이지 말라는 등의 극단적 도덕주의 용어를 즐겨 사용했다. 남과 다르다는 우월주의에서 나타난 차별적이고 선민적 용어 선택이다. 스스로 잘못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말이다. 운동권 꼰대다. 그러니 자신들이 한 잘못된 행위는 온통 이유가 있고 변명이 있다. 구질구질하다. 겸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잘못된 국가관이다. 역사는 통치자의 전지전능을 전제로 하는 플라톤-홉스 전통의 국가주의가 유토피아일 뿐이며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보여줬다.'(민경국, 국가란 무엇인가. 14쪽)
국가는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발목 잡지 말고 격려하는 역할이라도 충실히 해주면 좋겠다. 진짜 초식동물들은 절규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다음 달이면 어느덧 3년 차로 접어든다. 역대 정부는 대체로 3년 차에 새로운 어젠다를 제시해왔다. 2년 동안 내세웠던 어젠다가 약발을 다하는 경우가 많은 데다, 임기 후반을 이어가기 위한 새로운 동력을 창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집권 3년 차에도 새 어젠다 없이 배짱 좋게 그냥 넘어갈 것으로 보인다. 희망이 없다.
이들은 이미 지난 2년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경영했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열정으로 뜨겁다"고 말했다. 그래서 묻고 싶다. 2년간 보여준 이 나라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그 나라냐?
천영식 KBS 이사·계명대 언론광고학부 초빙교수·전 청와대 홍보기획 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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