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년(서기 1569년) 음력 3월 4일 아침. 대궐에 나아가 숙배했다. 임금은 호피 요 한 벌과 후추 두 말을 하사하고, 본도에 명해 쌀과 콩을 내리게 했으며, 연도에 명해 말과 배꾼을 주어 귀로를 호송케 했다. 정오에 하직하고 성을 나와 동호 몽뢰정에서 숙박했다.'(퇴계선생연보 중에서)
당시 유림의 정신적 지주였던 퇴계 이황 선생의 마지막 귀향길이 450년 만에 처음으로 재현됐다.
9일 서울 강남에 자리한 봉은사에는 도포를 입고 갓을 쓴 선비, 학자들로 북적였다.

이날은 '퇴계선생 마지막 귀향길 450주년 재현행사' 참여를 위해 안동을 비롯해 전국의 퇴계 후학과 유림들이 한자리에 모였기 때문이다.
450년 전인 1569년 봄날 69세의 퇴계선생은 '고향으로 내려가겠다'고 선조 임금에게 여러 차례 간청한 끝에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퇴계선생 귀향길의 원 출발점은 경복궁이지만, 서울 도심 구간이 근대 이후 급격한 개발로 경로와 풍광이 크게 바뀌면서 부득이하게 선생이 둘째 날 묵었던 봉은사를 기점으로 잡게 됐다.
이번 행사는 9일 서울 봉은사를 출발해 퇴계선생의 800리(320㎞) 귀향 일정과 동일하게 전체 육로 250㎞를 재현단이 매일 20~30㎞씩 11일 간 걷고, 충주댐 건설로 수몰된 옛길 70㎞는 배를 타고 이동해 21일 안동 도산서원에 도착하는 일정이다.
사실 퇴계선생과 봉은사의 인연도 이번 출발점 선정에 큰 의미를 더했다.

조선 중기 불교가 융성 시기를 지나 다시 배척되는 사회적 분위기로 급변하자 유림 사이에서는 대표적 사찰이었던 봉은사를 폐쇄하고, 그곳의 중심인물인 보우선사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주장이 빗발쳤다.
퇴계선생 역시 성리학자로서 불교를 배척하는 입장이었지만, 그 당시 유일하게 봉은사에 대한 탄압을 반대했다.
선생은 유학의 기본 이념인 '인(仁)'과 '경(敬)'에 비춰 볼 때 보우선사를 궁지로 몰고자 통문을 돌리며 집단 상소하는 것은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가 할 역할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개회식 환영사에서 봉은사 주지 원명스님은 "퇴계선생과 봉은사 사이의 포용과 너그러움의 인연으로 재현 행사를 추진할 수 있게 돼 봉은사야말로 영광이 아닐 수 없다"며 "선생의 사상을 모든 국민이 가슴 속에 새겼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병일 퇴계선생귀향길재현단장(도산서원 원장)은 "퇴계선생의 최대 염원은 '학문의 완성'이었다. 여기서 학문은 단순히 이론 공부가 아니라 사람답게 살아가는 올바른 삶의 실천"이라며 "요즘 사람들은 과학과 물질의 시대에서 예전보다 풍요로운 삶을 살지만, 개인은 힘들고 사회는 반목과 갈등으로 혼란스럽다. 이번 행사를 통해 당시의 퇴계선생이 추구하던 인간다운 삶을 각인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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