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 "국민이 주권 가진 온전한 나라 세워"

경북인들, 대한민국 탄생과 정부 수립에 중요한 역할 담당

임시정부 의정원 신년 기념 촬영. 경북도 제공
임시정부 의정원 신년 기념 촬영. 경북도 제공

오는 1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되는 날이다.

3·1만세운동은 대한민국을 탄생시킨 원동력이 됐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은 조국광복을 위해 27년 동안 중국에서 한치도 쉼 없이 투쟁에 나섰다.

임시정부 신년 기념 촬영. 경북도 제공
임시정부 신년 기념 촬영. 경북도 제공

전 세계에서 국가를 세우고 정부와 의회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펼쳐나간 사례는 보기 어렵다. 그 역사적인 활약 속에서 경북인들은 어김없이 핵심적 역할을 맡아왔다.

임시정부 환국 기념 촬영. 경북도 제공
임시정부 환국 기념 촬영. 경북도 제공

◆국민이 주권 가진 '대한민국' 세워

3·1만세운동의 영향으로 1919년 4월 10일 밤부터 다음날 10시까지 상해에서는 임시의정원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한국 역사에서 최초로 국민이 주권을 가진 나라를 세운 것이다. 4월 11일은 대한민국의 첫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공포되고,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이 구성된 역사적인 날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여러 정부 조직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노력한 끝에 한성정부(서울)에 정통성을 두고, 위치는 기존 상해로 정해 대한국민의회(블라디보스토크)를 합류시켰다. 이렇게 해 같은 해 9월 11일 마침내 상해에서 통합 정부를 구성했다.

경북인들은 대한민국의 탄생과 정부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안동 김동삼과 고령 남형우는 첫 임시의정원 회의부터 함께했다.

임시정부 경과도 그래픽. 경북도 제공
임시정부 경과도 그래픽. 경북도 제공

이후 9월 17일까지 열린 제2~6회 의정원 회의에도 안동 김동삼·김응섭, 성주 김창숙, 구미 김정묵, 경주 손진형 등 여러 명의 경북인이 참여했다.

정부에는 남형우가 1919년 법무총장에 이어 교통총장이 됐으며, 칠곡 장건상이 외무차장을 맡아 수립 초기의 틀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경북인들은 또한 비밀 결사를 꾸리고, 임시정부 자금지원 활동을 펼쳤다. 만주에서는 군정부를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독판 이상룡)로 바꾸고 임시정부 소속 무장조직으로 개편해 독립전쟁을 수행하고자 했다.

김동삼
김동삼
이상룡
이상룡
김창숙
김창숙

◆일송 김동삼, 국민대표회의 의장…석주 이상룡, 초대 국무령

임시정부 활동이 약화하자 독립운동계는 새로운 길을 찾고자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는 나라 안팎에서 130여 명의 대표가 참석했고, 5개월이나 지속됐다. 독립운동사에서 최대 규모이자 가장 오랫동안 진행된 이 회의에서 김동삼이 의장으로 선출돼 회의를 이끌었다.

국민대표회의에서 활동한 경북인들은 의장인 김동삼을 필두로 경북대표인 김상덕(고령)·윤자영(청송), 시베리아 지역 대표 김응섭(안동), 분경 한교구락부 대표 김정묵(선산)·김창숙(성주), 한족회 대표 김형식(안동), 국민대표준비위원회 남형우(고령), 길림교육회 대표 류시언(안동), 군사분과위원 배천택(대구), 서로군정서 대표 이진산(안동), 회의규정 기초위원 장건상(칠곡), 미주지역 대표 천세헌(상주), 외교분과위원 현정건(대구) 등이 참여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마땅한 길을 찾지 못하자, 임시정부는 이승만 임시대통령을 탄핵하고 후임에 박은식을 뽑은 뒤 헌법을 고쳐 내각책임제에 해당하는 국무령제를 채택했다.

수상에 해당하는 첫 국무령으로 선택된 인물이 이상룡(안동)이다. 만주 독립운동의 최고 인물을 받아들여 임시정부를 살려 보려는 뜻이었다.

국무령에 취임한 이상룡은 남북 만주 3부(정의부·신민부·참의부)의 핵심 인물은 물론 출신지를 골고루 헤아려 조각(組閣)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 노력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26년 봄 국무령 직책을 사임하고, 만주로 돌아왔다.

이상정
이상정
김상덕
김상덕
류림
류림
권준
권준

◆힘들었던 1930~40년대 장정·중경 시기

1932년 윤봉길 의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3년간 머물렀던 상해를 떠나야 했다. 그 뒤 8년 동안 항주·진강·장사·광주·유주·기강 등으로 옮겨 다녔다.

힘겨운 이동 중에도 임시정부는 전시체제를 갖춰갔다. 또한 여러 독립운동 정당을 묶는 일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을 세워 청년 장교를 길러냈다.

경북인도 영천 이진영, 안동 홍종민, 영주 박태양·박진양 등이 낙양분교에서 장교로 육성됐다. 이 시기에 안동 김상덕·김원식, 대구 이정호는 임시정부 주변 정당조직인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해 활동했다.

1940년 중경에 도착한 임시정부는 좌우세력을 묶어 통합정부를 꾸렸다. 더불어 대일 항전을 위해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좌파 군대인 조선의용대도 합류했다.

이로써 당·정·군 체제를 갖췄다. 좌우합작으로 독립운동세력을 통일해 총력전을 펼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이 시기 경북인으로 임시정부 내무부 차장을 맡은 상주 출신 권준과 내무부 비서 권태휴, 대구 출신의 임시정부 외교위원 신공제와 선전위원 이정호, 외무부 외교연구위원 이상정을 비롯해 칠곡 학무부장 장건상, 임시의정원 경상도 위원 안동 류림, 학무부 차장 고령 김상덕 등이 정부와 의정원에서 활약했다.

김재광 경북도 복지건강국장은 "대한민국 수립과 100년의 발전과정에서 경북인들은 언제나 중심에서 활약했으며, 그 정신을 계승해 웅도 경북의 미래를 이어갈 것"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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