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교칼럼] 더 어렵게 읽기(Lectio difficilior)

박용욱 신부 대구가톨릭대 의과대학 윤리학교실 주임교수

그리스도교의 성경은 긴 세월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오늘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누구 한 사람 책상에 앉아서 앞뒤를 딱딱 맞춰 써낸 글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손을 탄 책이다. 먼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내용을 채록한 다음, 그것을 읽고 전파하는 가운데 다시 여러 번의 편집을 거치고, 이렇게 탄생한 다양한 사본을 교회 공동체가 거르고 걸러 정제한 결과가 오늘의 성경인 셈이다.

그래서 성경을 연구하자면 다양한 성경 사본들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원문에 가까운가를 알아내는 작업이 필요한데 이를 본문 비평(Textual criticism)이라 한다. 본문 비평의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더 어려운 본문 우선의 원칙'(Lectio difficilior potior)이다.

사람들이 말을 전할 때는 대체로 자기가 이해한 바대로 쉽게 기억하고 전할 수 있도록 내용을 다듬는 경향이 있으니, 덜 다듬어지고 어려운 내용일수록 원문에 더 가깝지 않겠느냐는 상식적인 추론이다. 그런데 이 '더 어렵게 읽는' 방식은 비단 성경 본문만이 아니라 세상사를 관찰하고 판단하는 데도 무척이나 필요한 것 같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어렵고 복잡한 일을 너무 쉽고 단순하게 뭉그러뜨려 버림으로써 오히려 문제 해결을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매사를 강자-약자의 구도로 이해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카를 마르크스 이래로 세상을 근본적으로 강자와 약자의 권력 관계로 치환해서 설명하는 사회 이론들이 수없이 등장했다. 마르크스는 경제적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관계에 주목했지만, 이 도식에 착안한 이들은 사회의 온갖 영역을 강자와 약자의 이분법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우리 때와 요즘 것들, 강대국과 약소국, 남성과 여성, 기득권자와 소외된 사람들, 자연과 인간, 수도권과 지방' 등등 단순화된 범주들의 목록은 끝없이 이어진다. 그리고 이 범주 안에서 누군가를 판단하고 저주하는 성난 목소리들도 멈출 줄 모른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릴 것 없이 '혼내 주세요' '조리돌림해 주세요'라는 손가락질이 난무하는 이전투구의 상황이다. 한 줌 안 되는 강자를 끌어내리기만 하면 대다수 약자들이 빛을 보는 정의로운 세상이 저절로 올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매사가 그렇듯이, 한 가지 해답으로 풀릴 문제라면 애당초 심각한 문제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때의 약자가 강자가 되기도 하고, 약자가 더 약한 자들에게 강자로 군림하기도 하며, 강자의 끄트머리에 애매하게 매달린 이들이 애써 강자의 편에 서고자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요컨대 어떤 피조물을 막론하고 절대 악과 절대 선일 수 없으며, 인간은 맥락에 따라 강약의 입장을 바꾸어가며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톨릭 교회도 부활 직전의 한 주간, 곧 성주간(聖週間)을 시작하면서 긴 수난복음을 읽으며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묵상과 성찰 거리로 제시한다. 때로는 예수를 그리스도, 곧 세상을 구원할 분이라며 환호하다가 어느새 그분을 십자가에 매달라고 소리치는 인간 군상 속에서 내 자리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어렵고 어렵게 읽어야 할 세상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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