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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 이기경위설(理氣經緯說)의 대학자 여헌 장현광] <1> 선생의 탄생과 인동 장씨

여헌 장현광 영정.
여헌 장현광 영정.
여헌 장현광 선생이 살았던 모원당(慕遠堂·경북도 문화재자료 제390호)의 모습.
여헌 장현광 선생이 살았던 모원당(慕遠堂·경북도 문화재자료 제390호)의 모습.

16세기 조선 성리학계에 퇴계와 남명, 율곡이 있다면 17세기에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 선생이 있다.

구미 인동 출신인 여헌 선생은 독창적인 성리사상을 제기했던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유학자다. 퇴계와 남명, 율곡의 사상을 아우르는 '이기경위설'(理氣經緯說)을 제창한 인물이다.

조선 유학을 선도한 인물로 퇴계 이황, 율곡 이이와 더불어 한국 유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좁게는 구미·선산권 사림파의 전통을 계승하였으며, 넓게는 영남학파의 전통 속에 놓여있다.

특히 과거와 출세에 뜻을 두기보다는 자연에 은거하며 한평생 학문탐구와 후학양성에 힘썼다. 조선 성리학계의 거장인 여헌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본다. 〈편집자 주〉

〈1〉 선생의 탄생과 인동 장씨
〈2〉 짧은 수학기, 드높은 학문적 지향
〈3〉 잇단 슬픔과 굴곡진 삶의 여정
〈4〉 관직의 길 오르다
〈5〉 학문 연구와 강학의 기틀 마련하다
〈6〉 은인자중하며 강학에 몰두하다
〈7〉 강학 통해 문인 배출하다
〈8〉 서원과 향교의 재건, 그리고 선현추숭사업
〈9〉 인조반정과 산림으로의 징소
〈10〉 위대한 학자, 영원한 스승으로 기억되다

〈1〉 선생의 탄생과 인동 장씨

조선 명종 9년(1554년) 1월 구미 인동에는 폭설이 내렸다. 새하얀 눈이 온 세상을 뒤덮었다. 인동 중심지에는 이 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야트막하게 솟은 산이 있었다. 인동 장씨들의 관향산(貫鄕山)인 옥산(玉山)이다.

인동 장씨의 시조는 고려 초기에 상장군을 지낸 장금용이다. 장금용이 유유히 남쪽으로 흐르는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기름진 들이 펼쳐져 있고,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인동에 터를 잡고 살았다.

인동 장씨는 고려 초 인동에 정착한 후, 고려 중기부터 분파되기 시작해 25개 파로 분파됐다. 인동 향내 5개인 종파, 남산, 진가, 진평, 황상파가 인동 본향을 지켜왔다.

어느 날, 한겨울 옥산에는 불로초라 불리는 영지(靈芝)가 옥산의 신령스러움을 깨우며 홀연히 꽃을 피웠다. 눈 위에 붉은 꽃잎은 아침 햇살을 머금어 더욱 영롱해 보였다. 사람의 눈에 좀처럼 띄지 않는 귀한 식물의 등장에 반드시 큰 인물이 날 것이라며 확신하는 사람들의 기대가 높았다.

인동 장씨들은 장차 가문에 훌륭한 인재가 날 것이라고 여겼다. 옥산은 옥으로 된 큰 바위가 묻혀있으며, 현재는 인동장씨 시조와 선조 10명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옥산사(玉山祠)가 자리하고 있다.

옥산에서 영지가 나고 얼마 되지 않은 1월 22일 구미 인동현(仁同縣) 인선방(仁善坊) 남산(南山)의 몸채 뜰에서 자줏빛 상서로운 기운이 떠오르더니 아기의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고려(高麗)의 상장군(上將軍) 장금용(張金用)의 후손이며, 덕녕부윤(德寧府尹) 장안세(張安世)의 8대손(八代孫)인 여헌 선생의 탄생이었다. 아버지 이조판서 장열(張烈)과 경산 이씨(京山李氏)로 제릉참봉(齊陵參奉) 이팽석(李彭錫)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 6남매 중 독자로 여헌 선생이 태어났다.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기면서 예사로운 아이가 아닐 것이라 하면서 기뻐했다. 과연 아이의 울음소리는 우렁찼고, 눈망울이 초롱초롱 빛나고 맑았다.

이름은 현광(顯光)이고, 자는 덕회(德晦)이며, 호는 여헌(旅軒)이었다. 위로는 누나만 5명이었다. 딸만 있고 아들이 없어 대가 끊어질 것을 걱정해 여헌 선생의 할아버지 참판공 휘 계증은 매일 밤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뒤꼍에서 정화수를 떠놓고 북두칠성을 보며 기도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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