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데스크칼럼] "나는 참 무서웠다"

최경철 서울정경부장 겸 편집위원
최경철 서울정경부장 겸 편집위원

"그런데 그 군중이 나는 참 무서웠어. 군중이 혼란을 일으키면 결국 무력을 동원해야 진정이 되어요. 내가 4·19 때 부산 계엄사무소장이었는데 그런 모습을 보았어요. 내가 정복을 입고 군중 앞으로 나아가서 '같이 만세를 부르자'고 하여 진정을 시켰어요."

위의 글은 언론인 조갑제 씨가 쓴 '박정희'에 나오는 박정희 대통령(이하 박 대통령)의 회고다. 1960년 4·19혁명 당시 부산계엄사무소장으로 있으면서 계엄사무를 총괄했던 그는 4·19 당시를 이렇게 회상하며 '무서웠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군사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고 인권 탄압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으면서 '철권 통치'라는 비판에 휩싸였던 박 대통령조차 군중이 무서웠다고 털어놓은 것이다.

"오랫동안 박 대통령을 모셔왔으나 그처럼 경제에 대해 초조해하고 자신 없어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1970년대 후반, 잇따른 오일 쇼크로 경제가 휘청거렸을 때 김용환 당시 재무부 장관의 증언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이면서 경제 총사령관을 자처했던 박 대통령은 경제가 급격한 하향 곡선을 그리자 강한 두려움을 느꼈던 것일까?

박 대통령을 연구했던 적잖은 학자들의 논문은 그가 실적 때문에 밤잠을 설치는 영업사원처럼 '국민들에게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강한 압박감과 두려움을 갖고 있었음을 당시 관료들의 입을 빌려 기술하고 있다.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깡마른 모습의 5·16 거사 직후 사진으로 각인되는 박 대통령의 강인한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대목이다.

쿠데타 이후 정권을 장악한 직후 박 대통령은 당시 우리나라의 실상을 두고 "마치 도둑맞은 폐가를 인수한 것 같았다"고 실토(1963년에 펴낸 '국가와 혁명과 나'에 나오는 대목)했다. 폐가를 번듯한 양옥집으로 바꿔놓지 못한다면 자신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 신세라고 여겼을지 모른다.

인권 탄압 등을 내세우며 박 대통령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재야 인사들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박 대통령은 더욱 경제 성과 도출에 매진했다.

그가 권력을 잡은 직후인 1963년부터 통치 기간이 끝나기 1년 전인 1978년까지 한국 경제는 연평균 9.7%의 기록적 성장을 나타냈고 수출은 연평균 30%이상의 신장률(노무현 정부 시절 노동부 장관을 지냈으면서 진보적 경제학자로 불리는 김대환 전 인하대 교수의 1993년 논문)을 보였다. 김 교수는 여러 문제점도 있지만 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치적으로 평가된다고 했다.

재야의 민주화 투쟁이 격화될수록 박 대통령은 더욱 경제에 매달리면서 민주화 투쟁이 그 역할을 한 단계 전이시켜 경제 발전으로까지 선순환했다는 이른바 민주화운동의 '영역 전이' 현상도 많은 정치 학자들이 발견해냈다. 반민주적 독재라는 비판 속에서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을 진행, 그 성과 만큼이나 혹독한 비난에 휩싸였던 통치권자조차 실제로는 국민을 두려워하면서 밤낮없는 실적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박 대통령을 느닷없이 호명(呼名)한 이유는 절반 넘는 응답자들이 "안 된다"고 말한 여론조사가 나왔는데도 특정 인사를 거듭 밀어붙이는 요즘 청와대의 '오기'를 보면서다.

아무리 힘센 통치 권력이라도 국민을 이길 수 없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무조건 이긴다는 계약서 제목을 달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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