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은행 총재가 화폐 액면가를 낮추는 화폐 개혁, 이른바 리디노미네이션 논의 필요성을 거론하며 새삼 경제계의 관심을 모았다. 자본시장에서는 '리디노미네이션 관련주'가 벌써부터 언급되기 시작한다. 바야흐로 정부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중앙은행 내지 발권은행이 기점이 되어 화폐 개혁의 본질에 접근한 개혁 시도가 이뤄질 태세다.
해방 후 국내의 화폐 개혁은 '원'을 '환'으로, '환'을 다시 '원'으로 바꾸는 화폐단위의 변경을 수반해 2차례 있었다. 1차 화폐 개혁은 1953년 광복과 전쟁을 거치면서 발생한 악성 인플레이션 해소를 위해 100대 1의 비율로, 2차 화폐 개혁은 1962년 경제개발계획 실행을 위한 산업자금 조달 목적에서 10대 1의 비율로 시행하게 됐다고 한다.
어느 경우에나 통화 발권 기능을 가진 한국은행이 금융정책적 측면에서 관여한 것이 아니라 특수한 경제 사정하에서 정부가 현안을 풀어나가기 위한 특수한 방편으로 시작됐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최근의 리디노미네이션 논의는 그 세련된 용어만큼이나 한층 발전된 방식이라 하겠다. 한국은행 총재의 발언에 즉시 국회가 화답하고, 각계각층이 다양한 파생적 논의를 시작하며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하고 있다. 중앙은행의 독립된 지위와 권한 보장이 절대가치로 인정되는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 보자면 금융 민주화에 부합하는 당연한 절차를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리디노미네이션의 여러 논거들, 통용되는 화폐의 사용 단위가 너무 커지고 환율의 교환 비율이 지나치게 높다는 점은 수긍할 만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지적되듯이 화폐단위의 변경에 소요될 사회적 비용과 화폐 개혁 뒤 예상되는 상대적 인플레이션 등이 더 염려된다.
원래 작금의 화폐 개혁은 화폐단위의 교환 비율을 대폭 낮추자는 것이므로 고도 인플레이션이 나타난 경기 국면에 더 어울리는 대책이다. 현재 우리나라 경제는 최저임금 인상 정책으로 힘겹게 저수준 임금을 올리고, 양극화의 단면에서 저소득 근로자나 영세 자영업자의 소득수준은 과거 10년 동안 별로 오르지 않은 상태에 놓여 있다.
따라서 화폐 개혁 후 따라올 인플레이션까지 고려한다면 자연스레 화폐 개혁 뒤 저소득자들이 맞이할 박탈감이나 상실감이 우려되지 않을 수 없다. 반면 실물자산이나 금융자산을 많이 가진 계층은 어쩌면 통화당국이 의도한 화폐 개혁의 수혜를 그대로 누릴 공산이 크다.
오만원권이라는 고액 단위 화폐가 탄생한 지 10년도 되지 않았다. 고액권이 필요한 만큼 원화 가치가 하락한 것은 어쩔 수 없겠으나 이미 고액권으로서의 가치는 나름 톡톡히 하고 있다고 본다.
참고로 '환'으로 벌금 단위가 기재된 형법전에서 '원'으로 벌금형 단위를 개정한 때는 비교적 최근인 1995년이고, 2차 화폐 개혁 후로는 한참이 지난 시점이었다. 고액권을 발권한 지 10년이 채 되지 않아 리디노미네이션이 논의된다 하니 그 사이 강산이나 경제 지평이 얼마나 변했는지를 새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중앙은행이 발권은행으로서의 독립된 기능을 화폐 개혁을 통해 제대로 행사하려는 노력에는 진정 박수를 보내고 싶다. 금번 화폐 개혁 시도는 서방 강국의 경제 사정이나 정책 변동의 추이까지 두루 반영하려는 노력일 수도 있다.
그러나 화폐 금융에 관한 이론에만 입각하여 경제에 미칠 당장의 파장과 비용, 개혁 뒤 생성될 경제 환경에서 오히려 소외될 경제 주체의 입장을 도외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개혁이라는 이름을 달고는 있지만 적어도 화폐 개혁은 지금보다 진일보한다는 개선의 측면보다 화폐단위의 숫자 조정에 그치는 몰가치적이고 한시적인 대책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고 통화당국으로서의 순수성을 버리고 정부의 실물 경제정책에 훈수를 두려거나 훈수를 두려는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어서도 안 된다. 화폐 개혁의 목적과 득실에 관하여 발전된 사회적 논의가 이뤄지고 또 그 결실이 정책 결정에 잘 반영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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