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마담] 삶을 돌보는 글, 쓰기

이숙현 동화작가구미금오유치원 원장
이숙현 동화작가구미금오유치원 원장

지난달 어느 아침, 유치원 책상 위에 낯선 종이쪽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신문에 실린 글, 잘 읽으셨다며 어떤 분이 다녀가셨어요." 마음에 불이 댕겨졌습니다. 둘레가 환해졌어요. 새봄, 여린 잎 맑은 연둣빛처럼 싱그러운 기운이 솟았습니다. 찰나, 마감 직전 쓴 글을 고치고 또 고치며 낯빛이 파리한 여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사라졌지요. 웃음이 번졌습니다. 이어 입안에 맴도는 한 문장. "삶은 글을 낳고/ 글은 삶을 돌본다."

얼마 전, 지역 내 독립책방 '책봄'에서 만난 은유 작가가 자신의 책, '글쓰기의 최전선'에 선물처럼 적어준 글이었지요. 두 줄짜리 한 문장은 책을 읽는 내내 소리가 되어 가슴에 메아리쳤습니다.

여든 앞에 글과 그림을 배운 순천 할머니들의 그림일기인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를 만났을 때도 그랬습니다. 오랜 시간 삶으로 품은 말들이, 또박또박한 글씨로 종이에서 걸어 나와 읽는 이의 가슴에 콩콩콩 발자국을 새기는 것 같았어요.

<최고의 행복>-김명남 씀.

공부를 하니 젊어졌다고 합니다/ 글을 읽어도 쏙 들어오고 숙제도 재밌습니다/ 문자 못한 친구들은 나를 부러워합니다// 성격도 활달하게 변하고 말도 잘하고/ 공부가 나를 달라지게 했습니다// 생전 처음 그림을 그렸습니다/ 내가 살아온 인생도 글로 썼습니다/ 책이 나오고 서울에서 전시를 했습니다/ 갑자기 방송, 신문, 잡지에도 나왔습니다/ 내가 대단한 사람으로 느껴졌습니다// 나는 그림을 그릴 때마다 사진을 찍어서 /자식들한테 보냈습니다/ 자식들은 우리 엄마 대단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식들하고 대화도 많아졌습니다/ 나는 지금이 내 인생에서 최고의 행복인 것 같습니다

연필과 사인펜, 색연필처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그린 할머니들의 그림도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색도 힘도 구성도 조화도 남다릅니다. 처음 그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고 정겹고 멋진' 그림들. 일주일에 한 번씩, 왕복 여섯 시간이 넘는 먼 거리를 오가며 그림 수업을 이끈 김중석 그림책 작가는 최근 이 책을 널리 알리려 볼로냐 아동도서전에 다녀왔다지요. 이 놀라운 여정이 당신과 닿고 닿아서, 또 어떤 시간들로 이어질지 새삼 궁금해집니다.

미지의 시간 헤아리는 마음에 떠오른 책 제목, '나오니까 좋다'. 백 권도 넘는 책에 그림을 그려온 김중석 작가가 쓰고 그린 반가운 그림책, '나오니까 좋다'. 책을 만난 아이들 말이, 책 이름을 잘 지었답니다. 책 보니까 좋다! 노니까 좋다! 먹으니까 좋다! 깔깔거리며 말놀이 즐기는 아이들. 마침, 지역에 처음 생긴 그림책방 '그림책 산책'에서 작가를 초대했다는 소식을 듣고 늦은 오후, 아이들과의 짧은 만남을 부탁드렸어요. 기꺼이 마음 내어 유치원에 와 주신 작가님. 그 덕분에 책 속 매력적인 주인공, 고릴라 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고릴라는 하루아침에 뚝딱, 태어난 것이 아니었어요. 이제껏 작가가 그려낸 고릴라 그림은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대학생 때 그린 첫 번째 고릴라에서 달라지고 달라진 수많은 고릴라 그림들을 마주하며, 은유 작가의 한 문장을 새롭게 떠올렸습니다. "삶은 그림을 낳고, 그림은 삶을 돌본다."

'마감은 힘들지만, 당신에게 닿으니까 좋다'라고 써봅니다. '삶을 돌보는 글 쓰니까 좋다'라는 문장을 살아내고 싶다 바라봅니다. 마음 나누는 이들과 함께 쓰고, 쓴 글 자박자박 소리 내어 읽으며, 글이 몸을 거니는 순간들 누리는 분들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간절한 '글이 삶을 돌보는 시간들' 바라고 꿈꾸며, 진도 팽목항 '기억의 벽' 타일에 여럿이 더불어 쓰고 그린 마음 불러봅니다. 그리고 다시, 힘주어 한 글자 한 글자 씁니다. 잊.지.않.을.게.요. 기.억.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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