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학(詩學)은 서양에서 가장 오래된 문예 창작 이론서다. 저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BC 384년에 태어났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2400년 전의 일이다. 까마득한 세월 동안 권위 있는 고전으로서 전공자가 아니면 함부로 읽으면 안 되는 책인 듯 우리를 압박하기도 했다.
한데 오해다. 시학은 시 작법서만은 아닌 까닭이다. 전체 26장이 전해지는데, 앞부분 4장은 예술과 미학 일반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고, 끝부분 서사시에 대한 몇 장을 제외하곤 대부분 비극(연극)에 대한 극작법을 담고 있는 책이다. 비극(悲劇)이란 슬픈 드라마가 아니던가. 그간 많은 사람들이 시학을 번역했지만 박정자가 번역하고 해설한 이 책은 마치 한 편의 드라마처럼 우리의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자그마한 크기. 자로 재어 보니 110×180mm다. 주말 나들이를 할 때도 재킷 주머니에 쏙 들어간다. 제목도 '스토리텔링의 비밀이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다. 비밀이라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비밀 이야기라면 자다가도 벌떡 깨서 듣지 않던가. 제목에서부터 재미있는 미늘문(첫 문장)을 던진 셈이다.
편저자인 박정자는 현재 상명대 명예교수이다. 서울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불문학 박사를 받았는데, 그 전에 이화여고를 졸업했다. 이화여대 대학원에서도 '예술철학' 등을 강의하고 있으며 '로빈슨 크루소의 사치', '시선은 권력이다' 등 문화체육관광부의 추천도서들을 쓰기도 했다.
편저자는 서문에서 한국의 시청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인 줄도 모르고 아리스토텔레스를 소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문학적 소양이 좀 부족한 사람도 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을 통달하고 있다는 것. 막장 드라마의 반전, 출생의 비밀 등이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라는 것이다. 편저자의 서문과 역자 해설이 본문 못지않게 와 닿는다.
역자 서문 속에는 역자의 생각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 고루 요약돼 있다. 예술이란 게 무엇인가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미메시스'라는 말에 함축돼 있다고 전한다. 딱히 번역하자면 모방(模倣)이라고 한다는데…. 예술이 모방이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도 어쩌면 모방의 연속이 아닐는지. 조금 포장하자면 창조적 모방이랄까.
역자는 영화 '올드보이'의 오대수가 왜 납치됐는지를 묻는다. 영문도 모른 채 납치되어 15년간 감금당했던 오대수는 왜 그런 상황에 처했던 것일까. 그것은 어린 시절의 부주의한 발설에서 기인했다며, 그 순간적 판단 착오를 '하마르티아'라고 알려준다. 근친상간적 모티프의 '올드보이'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오이디푸스 신화와 일맥이 상통해 상호텍스트적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정화(淨化)로 해석되는 '카타르시스'도 빼놓을 수 없는 개념이다. 카타르시스의 원뜻은 배설이라는데. 이 카타르시스가 우리에게 연민과 공포를 주며, 그것이 과할 땐 적당히 배출시켜 주고 또 부족할 땐 보충하게도 한다. 양극단의 중간 지점이 행복한 상태라고 하니 연민과 공포도 적당히 가지고 사는 게 좋은 건지도.
주말이 되면 아내와 함께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을 본다. 드라마의 스토리를 따라 슬퍼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하며 거기에 푹 빠진다. 아마도 이 책의 편저자 역시 휴일엔 가족과 함께 그러지 않을는지. 우리는 막장 드라마라고 비난하면서도 기어코 그 드라마를 보곤 하는데, 그 이유가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었다면 '헉' 하고 놀라지는 않을까.
오는 주말에도 드라마를 볼 것이다. 그 전에 한 번쯤 인문적 사색을 해 보자는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권해 본다.
장창수 학이사독서아카데미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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