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언제 어떻게 당할지 모른다'…계속되는 '묻지마 범죄'

연평균 50여건 발생…절반 이상 살인·상해 사건
"억눌렸던 분노 극단적 표출…분노조절 사회안전망 구축 필요"

한 40대 남성의 '묻지마 칼부림'에 고요하던 새벽의 아파트는 핏빛 공포로 물들었다.

17일 새벽 화재를 피해 아파트 밖으로 빠져나온 주민들을 기다린 것은 흉기를 든 안모(42) 씨였다. 피해자들은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낯선 남성이 휘두른 흉기에 중상을 입었고, 심지어 목숨도 잃었다.

주민 5명이 숨지고 13명이 다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 경남 진주의 '묻지마 살인 난동'이 사람들을 공포에 빠져들게 하고 있다.

안씨가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른 뒤 불길을 피해 뛰쳐나오던 이웃 주민들에게 흉기를 휘둘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민들은 '어떻게 세상에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느냐'며 경악했다.

안씨는 과거 조현병을 앓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아직 정확한 범행 동기는 알려지지 않은 상태다.

◇ 고시원 방화와 판박이…'묻지마 범죄' 되풀이

지난달 서울 한 편의점에서 40대 남성이 목검과 흉기를 휘둘러 시민 2명이 다친 사건이나, 지난해 10월 경남 거제에서 20대 남성이 아무런 이유 없이 50대 여성을 때려 숨지게 한 일도 이번 사건과 다르지 않다.

지난 2008년 10월 20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고시원에서는 당시 31살이던 정모 씨가 자신의 침대에 불을 지른 뒤 놀라 대피하던 사람들에게 흉기를 휘둘러 6명이 숨지고 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정씨는 예비군 훈련에 불참해 부과된 벌금 150만 원과 고시원비, 휴대전화 요금 등을 내지 못하게 되자 '묻지마 살인'을 준비한 것으로 드러났다.

문제는 이처럼 특별한 동기가 드러나지 않는 범죄가 좀처럼 줄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바른미래당 오신환 의원이 법무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묻지마 범죄'는 2013년 54명, 2016년 57명, 2017년 50명 등 연평균 50여건 발생하고 있다.

2017년 기준 묻지마 범죄 절반 이상은 살인과 상해 사건이었다. 한 번 발생하면 대형 인명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

또 정신장애가 있는 범죄자 재범률은 전체 범죄자 재범률보다 눈에 띄게 높다.

지난해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강창일(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경찰청에서 제출받은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정신장애범죄자'로 분류된 이들의 최근 5년간 재범률은 2013년 65.9%, 2014년 64.9%, 2015년 64.2%, 2016년 64.3%, 2017년 66.3%였다.

같은 기간 전체 범죄자 재범률은 2013년 48.9%, 2014년 48.2%, 2015년 47.2%, 2016년 47.3%, 2017년 46.7%로 정신장애인 재범률보다 현격히 낮았다.

◇ "사회적 병리현상…예방 시스템 구축해야"

전문가들은 묻지마 범죄를 두고 사회적 스트레스가 높아지면서 생긴 '병리현상'이라고 설명한다.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소외에 대한 스트레스가 커졌음에도 이를 적절하게 해소할 장치나 수단이 없어 범죄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 어린이, 노인 등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묻지마 범죄의 특징이다.

박미랑 한남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묻지마 범죄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의 간극에 대한 스트레스를 적절하게 해소하지 못하다가 극단적으로 표출하는 좌절감의 분출"이라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이어 "극단적인 분노 표출의 대상은 자신보다 약한 사람인 경우가 많다"며 "여성이나 어린이 등 사회적 약자를 표적으로 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사회가 개인화하면서 '공동체 정신'이 약해졌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김영석 충북도사회복지협의회장은 "기계에 의존하며 즉각 정답을 원하는 성향이 일반화하면서 고민하고 생각하는 시간이 사라졌다"며 "이 때문에 자기 마음에 맞지 않으면 즉각 행동으로 옮겨버리는 등 남을 배려하는 정신이 생략된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한 동기 없이 불특정 대상을 향한 범죄여서 대응이 쉽지는 않지만, 전문가들은 사회안전망 구축이 대안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들의 범죄를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고 방관할 게 아니라 분노조절 장애 범죄를 예방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박미랑 교수는 "사회·경제적으로 소외된 이들의 긴장 상태를 풀어 주려면 복지 수단이 연동돼야 한다"며 "소외된 이들이 막다른 절벽에 내몰리지 않도록 하고, 낙오하더라도 재기할 기회를 얻는 사회라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경찰청 범죄행동분석팀장을 지낸 권일용 동국대 교수는 "정신과 치료를 받는 사람 중 상당수가 고립돼 살면서 치료가 중단되고 더 병증이 악화해 사회적 문제로 드러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지역사회에서 이런 사람들을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묻지마 범죄는 대부분 정신질환자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에 예방 자체가 쉽지 않다"면서도 "정신질환자의 기본권을 보장하면서 범죄를 예방할 수 있는 방안을 의료계와 경찰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 "정신질환자 특별관리 필요" vs "사회적 낙인 우려"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사회적 배려와 관리가 시급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반복적으로 남에게 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사람이라면 특별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정석 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 정신의학과 교수는 "사회로 복귀한 정신질환자에게 외래 진료를 의무화한 외래치료 명령제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며 "근본적으로는 정신질환자 치료를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는 '임세원법' 같은 총괄적인 법적 기반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과 차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권오용 한국정신장애연대 사무총장은 "비록 조현병이 있었다고 해도 조현병과 폭력적인 성향이 직접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정신장애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낙인찍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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