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성리학 대학자 구미 인동 출신 여헌 장현광] <2> 짧은 수학기, 드높은 학문적 지향

구미 임수동 여헌기념관 앞에 세워진 여헌 장현관 선생 좌상. 전병용 기자
구미 임수동 여헌기념관 앞에 세워진 여헌 장현관 선생 좌상. 전병용 기자
구미 오태동에 있는 여헌 장현광 선생 묘. 전병용 기자
구미 오태동에 있는 여헌 장현광 선생 묘. 전병용 기자

여헌 장현광 선생이 태어날 당시에는 을사사화(乙巳士禍·1545년)와 을묘왜변(1555년) 등으로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갈등이 끊이지 않았던 혼란기였다.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시대에 여헌 선생은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뛰어난 학문 세계를 구축했을 뿐만 아니라 영남을 대표하는 산림(山林)으로 우뚝 섰다.

〈2〉 짧은 수학기, 드높은 학문적 지향

여헌 선생은 어려서부터 글 공부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종아리를 맞아가며 아버지에게 글을 배우던 여헌 선생은 일곱 살 때 글을 짓는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하지만 여덟 살 때 상주가 되면서 잠시 글공부를 멈추기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일 년이 지났을 때 어머니는 여헌 선생을 불러 앉히고 "네 나이가 지금 아홉살인데, 글 공부에 손을 놓고 있어서야 되겠느냐? 네가 지금 공부를 하지 않으면 영영 못 할 수 있다. 궤연은 누나들과 지킬 터이니, 너는 자형한테 가서 공부를 하거라"고 가르쳤다.

이에 따라 여헌 선생은 아홉살 되던 해에 구미 선산읍 독동리에 있던 자형 송암(松庵) 노수함(盧守諴) 공에게 가서 공부를 이어갔다.

하루는 신당 정붕의 아들이자 송당 박영의 제자인 정각이 친구인 송암의 집을 방문했다.

스승과 학문을 나누고 있는 어린 여헌을 지켜보며 그 학문의 깊이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수려한 얼굴과 바른 자세까지 더하니 정각의 온 마음이 그 아이에게로 향했다.

"이런 영특한 아이는 처음 보았네그려. 이 아이는 기상이 굉위(宏偉)하여 반드시 세상에서 특출한 사람이 될 것이네. 내 무엇이든 저 아이에게 주고 싶은데 무엇을 줘야 할까?"

이튿날 아침 송암의 집 마당으로 말 한 필이 들어왔다. 정각이 자신의 애마를 여헌 선생에게 선물로 보낸 것이다. 여헌 선생은 지나친 선물을 받을 수 없다며 정중하게 사양했다.

노수함의 문하에서 학문에 대한 첫걸음을 내디딘 여헌 선생은 유학의 주요 경전을 익히고 13세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직도 자신의 배움이 완전히 채워지지 않았음을 깨닫고, 14세에 학거 장순에게로 배움을 청했다. 장순은 성리학의 근원이 되는 우주 자연에 대한 체계적인 인식을 갖추고 있는 학자였다.

이전의 배움이 경전에 대한 이해에 한정되었다면, 이 시기의 배움은 성리학 일반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와 더불어 우주 자연에 대한 근본적인 배움을 도모했다.

여헌 선생의 학문은 18세에 성숙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스승이 읽고 있던 성리대전(性理大全)을 빌려 홀로 독서와 탐색을 거듭했다. 침식을 잊고 몇 날 며칠을 탐독해 그 내용이 마음속으로 들어오니 희열을 느꼈다.

그동안 공부한 것을 종합하고 포괄해 앞으로 학문할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그것은 우주의 중요한 모든 것을 한데 묶은 '우주요괄(宇宙要括) 10첩'이었다.

여헌 선생의 한평생 학문할 계획의 범위가 매우 넓고 그 목표가 높았다. 최종 목표는 천하에서 제일가는 사업을 통해 천하에서 제일가는 인물이 되는 것이었다.

여헌 선생은 "사람이 천지 사이에 태어나서 우주 간의 사업을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로 삼아야지, 자기의 한 몸이나 눈앞의 일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 또 하루나 한 해, 한 시대에만 하고 마는 것도 옳지 않다"면서 우주 사업을 늘 꿈꾸었다.

한평생을 그런 마음가짐으로 공부했기에 위대한 학자로 후세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인조는 그에게 내린 제문에서 "500년 만에 한 번 나는 큰 인물"이라고 칭송했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