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청라언덕] '묻지마' 이면에 숨은 불평등 상흔

한윤조 사회부 차장
한윤조 사회부 차장

인류학자인 사피어와 그의 제자이자 언어학자인 워프는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규정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사고를 바탕으로 언어를 만들어냈고, 다시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사고를 언어라는 방식을 통해 타인에게 전달한다. 그래서 사피어&워프는 사람들이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의 표현 방식대로 생각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최근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는 진주에서 발생한 5명을 숨지게 하고 13명을 다치게 한 방화·살해 범죄였다. 언론은 주로 이 사건을 '묻지마 범죄'라고 명명했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표적이 될지 모르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묻지마 범죄'라는 별칭이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피하려야 피할 수도 없어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나도 자칫 희생양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공포심이 극대화된다.

하지만 '묻지마'라고 했을 때는 그 어감 뒤에 가려 사건의 실체는 흐릿해지고 만다. 어차피 원인을 알 수 없고 예측 불가능하다 보니 굳이 분석하고 대응 방안을 마련하기보다는 개인의 탓으로 돌리고 말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현병' 등 특정 질병이 유독 불거지면서 이들에 대한 집단 혐오감을 부추기기도 한다. 범죄 대상이 여성이나 어린아이 등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도 많아 사실상 불특정 다수가 아닌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한다는 사실도 쉽게 간과된다. 우리가 쉽게 이름을 붙여서는 안 되는 이유다.

전문가들은 이런 유형의 범죄가 빈발하는 데 대해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로 인한 사회적 박탈감, 그리고 지나친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 분위기 탓이라고 분석한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발표한 '묻지마 범죄자의 특성 이해 및 대응 방안 연구'에 따르면 가해자들의 범행 동기 중 ▷정신병적 증상 등의 이유로 저지른 경우(26.5%)가 가장 많았고 ▷폭력성을 과시하거나 그냥 저지른 경우(25%) ▷분풀이와 스트레스 해소(23.5%) 등이 뒤를 이었다.

결국 많은 경우 정신병적 원인과 사회적 불만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이 같은 범죄가 발생하고 있는 일종의 '분노 범죄'인 셈이다. 이는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위협 중 하나가 됐다.

'불평등 트라우마'라는 책에서 리처드 윌킨스와 케이트 피켓은 "불평등이 사람들의 감정과 사회의 본질에 영향을 미친다"고 봤다. 이들이 세계정신의학저널에 게재한 논문에 따르면 소득 불평등이 심한 나라는 비교적 평등한 나라에 비해 정신질환 비율이 3배까지 높았다. 특히 소득 격차가 큰 사회에서 조현병이 더 흔하다는 연구도 있다. 50개국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소득 상위 1% 인구가 차지하는 소득 비중이 증가할수록 환각, 망상 심리, 사고 조종 망상 등을 경험하는 인구가 증가했다.

이번 사건이 벌어지자 많은 언론과 시민들은 조현병에 집중했지만 결국은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이 만연한 불평등으로 인한 분노를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는 어느 누구나 위험에 노출되는 상황을 막을수 없다.

결국 모두의 안전을 함께 지키는 방법은 보다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적 사회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다. 상처받고 아파하는 이들을 떠밀어내 홀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사회가 함께 이들을 껴안을 방법을 마련하는 것이 최고의 안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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