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데스크 칼럼] 도로의 시대, 성벽의 나라

조두진 문화부장

조두진 문화부장
조두진 문화부장

대구 동성로·서성로·남성로·북성로는 1906년까지 대구읍성 성벽이 있던 자리다. 1900년대 초 대구에 거주하면서 크고 작은 사업을 하던 일본 사람들이 1907년 대구부 군수 박중양과 결탁해 성벽을 허물고 도로를 냈다.

대구읍성은 조선 선조 23년(1590년) 왜구 침략에 대비해 토성으로 쌓았다가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후 영조 12년(1736년) 석성으로 다시 축조했다. 성곽 둘레는 2천560m, 폭은 8.7m, 높이는 3.5m 정도로 알려져 있다.

1800년대 중반 서구 열강의 동아시아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서구 열강과 동아시아는 충돌했다. 청나라(중국)는 영국과 아편전쟁에 지고 각종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 쇄국정책을 펴고 있던 일본 역시 미국의 무력 시위에 굴복해 불평등 조약을 맺고 문호를 열었다. 독일인이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무덤을 도굴하려던 시도에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조선도 서양에 대한 두려움과 적개심을 불태웠다.

세상의 중심이자 세계 최강인 줄 알았던 청나라가 영국에 박살 나자 조선은 전국 각지의 성벽을 개보수했다. 1736년 돌로 쌓았던 대구읍성 또한 1870년 대대적인 보수를 통해 성벽을 높이고, 이전에는 없던 여첩(女堞)까지 만들며 전투에 대비했다.

조선은 튼튼한 성벽으로 오랑캐의 총포를 막을 수 있다고 믿었지만 대구읍성을 허문 것은 총포가 아니라 일본 상인과 사업가들의 자본이었다. 대구읍성이 허물어지는 과정에서 총소리나 대포소리는 없었다. 세상의 패러다임이 변한 것이다.

일본인들은 돌로 쌓은 대구읍성을 허물고 그 자리에 쇠로 된 성을 쌓은 게 아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 도로를 내고, 상점을 열고, 기업을 세웠다. 돌담을 두텁게 둘러 나라와 도시를 지키던 시대는 오래전 종말을 고했고, 자유로운 왕래와 무역에 필요한 길(항로)을 열어야 나라와 도시를 지킬 수 있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세상의 패러다임이 돌담에서 도로로, 쇄국에서 개방으로, 유학에서 과학으로 변했음에도 조선은 그것을 몰랐거나 인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는 식민지화였다. 18세기와 19세기, 전 지구 차원에서 시대에 끌려가는 자들과 시대를 끌고 가는 자들이 부딪쳤고, 세계 인구의 5분의 4는 식민지인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대구읍성은 전근대적인 왕조국가를 상징하고, 성벽을 허물고 낸 도로는 왕조국가의 멸망과 제국주의 상업국가의 세상을 은유한다고 할 수 있다.

대구 중구청과 시민사회가 주축이 돼 대구읍성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대구읍성이 대구의 중요한 역사적 기반인 데다 중구 근대골목이 관광 명소로 각광받으면서 옛 구조물을 복원하면 관광객 유치에 더 힘을 실을 수 있다는 기대에서다. 복원 후에는 내심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도 기대하는 눈치다.

대구읍성을 전체적으로 혹은 일정 구간이라도 복원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대구읍성이 규모가 매우 큰 성도, 미적으로 아름다운 성도, 국난에서 나라를 구한 역사적 의미가 있는 성도 아니라는 점이다. 대구읍성을 옛 모습대로 복원하는 것만으로는 가치가 클 것 같지 않다는 말이다.

오히려 대구읍성이 허물어지는 과정과 허물어질 당시 조선인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재현하는 것이 우리 역사나 세계사에서 더 큰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대구시민들과 대구를 방문하는 세계인들이 복원된 대구읍성을 보며 "조선 사람들은 이렇게 살았구나"고 되짚어 보는 공간이 되기보다는 "세상의 흐름을 무시하거나 모르면…"이라고 미래를 생각하는 공간이기를 바란다.

그다지 아름답지도 웅장하지도, 감동적인 역사도 없는 작은 성을 복원하는 정도로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될 가능성도 낮다. 하지만 세계인의 5분의 4가 식민지로 전락한, 인류사에 유례없는 '한 시대'를 보여주는 실재 현장(성벽 VS 도로)으로 재현한다면 인류의역사로서 가치도 충분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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