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4월 12일 쓰시마를 떠난 고니시 유키나가는 13일 부산진에 닻을 내려, 부산진 첨사 정발의 항전을 무력화시킨다. 14일 동래성으로 올라와 "전즉전(戰卽戰)부전(不戰)가아도(假我道), 싸울 테면 나와 싸우고 아니면 길을 비켜 달라"는 통첩을 보낸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전사이(戰死易)가도난(假道難), 싸워 죽기는 쉬워도 길을 내주기는 어렵다"고 답하지만 허무하게 무너진다. 24일 순변사 이일이 상주에서 패하고, 29일 도순변사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다가 목숨을 잃는다. 마침내 5월 2일 수도 한양이 왜군 수중에 떨어진다. 28일은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이다. 4월은 이처럼 우리에게 임진왜란의 기억을 짙게 드리운다. 임진왜란은 조총(鳥銃)과 떼 놓을 수 없다. 일본은 어떻게 조총을 손에 넣었을까?
◆태풍으로 표류한 포르투칼 상인 일본에 조총 전해
조총은 하늘을 나는 새(鳥)를 떨어뜨린다는 명나라식 이름이다. 일본에서는 화승총(火繩銃), 혹은 철포(鐵鉄砲)라고 부른다. 겁 없는 사람을 '무데뽀'라고 하는데, 일본말 무철포(無砲)다. 총도 없이 목숨 내놓고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일본이 철포를 입수하게 된 경위는 포르투갈과 맞물린다. 1543년 향료의 고장 인도네시아 몰루카 제도를 돌아 필리핀으로 가던 포르투갈 상선이 태풍에 밀려 대만과 오키나와를 지나 일본 규슈 남단 가고시마 근처 다네가시마 섬에 표류한다. 당시 다네가시마 섬 지배자는 16세 청년 영주 도키다카(時堯). 그는 포르투갈 상인이 갖고 있던 조총의 위력을 간파하고 거액을 들여 2정을 사들인다. 이어 부하를 시켜 1년여 만에 자체 제작에 성공해, 상부에 바친다. 1544년의 일이다.
◆포르투칼 상인에게 시집간 효녀 덕에 기술 받아
다네가시마 섬에 가면 철포 박물관에 일본 최초의 조총(사진)을 복원 전시 중이다. 이를 보고 나오면 도키다카의 동상 옆으로 '총효비'라는 작은 돌 기념물이 기다린다. 주인공은 와카사(若狹)라는 여인. 도키다카의 명을 받고 조총 제작에 나선 일본인이 방법을 몰라 고민 끝에 포르투갈 상인을 찾아간다. 포르투갈 상인은 그의 딸 와카사를 아내로 요구한다. 이 말을 들은 와카사가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결혼에 응하면서 기술 전수가 이뤄졌다. 여인의 효심을 제물로 신기술을 얻었던 일본은 다네가시마 섬에 우주기지를 세워 운영 중이다. 우리의 나로도 우주센터와 같다.
◆천주교도 고니시 유키나가 군대, 조선포로 세례
포르투갈은 일본과 교류하며 1549년 천주교를 전파한다. 이어 일본의 소개로 1557년 명나라로부터 마카오를 무역 거점으로 할양받는다. 이런 우호 관계 속에 일본 내 천주교 신자가 급격히 늘어난다. 1579년 15만 명까지 늘어난 일본의 천주교도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 세례명 아우구스티노다. 그는 1만8천 명의 천주교 신자로 구성된 1군을 이끌고 조선에 침략해 부산진과 동래부를 초토화시킨다. 세스페데스를 비롯한 예수회 소속 선교사들도 종군신부로 데리고 와 2천여 명의 조선인 포로에게 세례를 준 것으로 기록된다.
◆세계에 문 연 일본, 당쟁에 문 닫은 조선
일본이 세계와 만나며 전쟁을 준비할 때 조선은 1590년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 일행 200여 명을 조사차 일본으로 보낸다.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을 준비하고 도요토미의 눈이 빛나고 담략이 있어 보여 대비가 필요하다고 보고한다. 하지만 선조는 서인이던 정사 황윤길과 달리 동인이던 부사 김성일의 반대의견을 따른다. 그것도 모자라 전쟁을 대비하던 관리들을 문책한다. 세계를 향해 문을 열었던 일본과 정반대인 조선의 꽉 막힌 당쟁 속에 조선의 운명은 풍전등화로 몰렸다. 무한 경쟁의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교훈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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