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당선작 '늦깎이 인생'](5회)

일러스트 전숙경(아트그룬)
일러스트 전숙경(아트그룬)

이차 면접에서 예상했던 문제가 터졌다.

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데 이론수업은 그렇다 치고 어떻게 그 어려운 해부실습 수술실실습 등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겠는가를 두고 면접관 교수님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충남대학교에 의과대학이 신설 된 지 5년 밖에 안 되었으니 이런 경우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아직 없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면서도 불합격되면 어쩌나 노심 처사 끝에

최종 합격이라는 반가운 소식을 받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수석 합격생이 나와 비슷한 수준의 지체장애인이라

나도 덩달아 합격이 된 것이었다.

이것이 단순한 행운이 아니라는 사실을 살아가면서 절실히 느끼게 된다.

▶의과대학 졸업

입학했다는 기쁨과 뿌듯한 마음으로 즐겁게 예과 2년을 마치고 본과로 진학하자마자 해부학 실습이라는 고약한 놈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격한 포르말린 냄새야 병원 생활을 오래 한 나였기에 별문제가 없었지만 어려운 의학용어 그리고 나이 어린 의대 선배들의 군기 잡기가 결코 녹록지 않았다.

툭하면 이런저런 핑계로 매타작이 다반사라 아예 내복을 두툼히 입고 학교에 다녔다. 그렇지만 의사가 되어야 신부도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버티고 버텼다.

임상에 들어와서는 정신과라는 학문에 매료되면서 그리고 연애를 하면서 반드시

신부가 되지 않아도 정신과 의사가 된다면 내 꿈의 절반은 이루어질 것이라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신부에의 꿈을 접고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어렵고 고단하다는 인턴 생활도 여러 동기생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마치고 정신과를 지원하려 했으나 모교에는 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 또한 운명이었을까? 인연이었을까?

지금은 고인이 되신 정신과 주임교수님의 소개로 서울 강북삼성병원에 가서 이시형 박사님의 제자가 되었다.

▶정신과 전공의 시절

서울에서의 정신과 전공의 시절은 나의 황금기였다.

이런저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난 후라 그런지 건강에도 어느 정도는 자신이 있었고

정신과 공부와 진료 역시 내 적성에 맞아 즐겁게 수련을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잠이었다.

몇 날 며칠을 연속해서 당직하고 하룻밤에도 몇 번씩 응급실을 오르내리며 환자를

보니 다시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것 같았다.

도저히 참기가 어려워 하루는 회진이 끝나자마자 이시형 박사님께

'' 저 잠 좀 재워주세요.'' 라고 하소연을 드렸다.

그런데 대답이 걸작이셨다.

''닥터 김은 밥을 앉아서 먹나 서서 먹나? 예일대학에서는 전공의들은 식당에 아예 들어가지도 못해. 전공의들은 식사도 서서 그것도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면서 일해.''

'그렇구나! 전공의는 상머슴이니 당연한 고생이구나. 그래도 인턴 시절보다는 낫구나!'라고 스스로에게 위안을 하며 정신과 전공의를 무사히 수료하고 전문의 시험도 합격했다.

▶전문의 시험 끝나는 날

일차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며칠 후 실기시험을 끝내고 나오자, 나는 마치 바람이 가득 든 풍선을 그냥 놓아버린 것처럼 허탈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감각마저도 잃어버린 채 순간 멍하니 서 있다가 청주에 계신 아버지께 우선 인사부터 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청주행 고속버스를 탔다.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생전에 안 하던 멀미를 하는 것이었다.

이상하다 생각하던 차에 아랫배가 아파왔다.

간신히 집에 도착하여 아버지께 큰절을 드리고 앉자마자 맹장염에 걸린 것 같다고

말씀드렸더니 맹장이 터지면 죽을 수도 있으니 당장 병원에 가자고 하신다.

하루만 지켜보자고 말씀드리고 방에 들어가 누우니 교과서대로 순차적으로 맹장염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대학 선배가 근무 중인 종합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았다. 맹장이 터지기 직전이었다고 선배가 말했다.

이것이 열세 번째 수술이니 이제 제발 수술은 그만 받으라고.

천운이었다.

만일에 하루만 일찍 맹장염이 발병했더라면 그렇지 않아도 늦은 내 인생 열차를 또

일 년 더 늦출 수밖에 없었을 터.

▶대학교수의 꿈을 접다

정신과 전문의가 되고 대학 전임강사로 발령받고 고향 부산으로

금의환향한 나는 대학교수로서의 꿈을 키운다는 희망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나를 살려주시고 오늘이 있게 해주신 조성옥 박사님과 김의진 박사님의 격려도 엄청 힘이 되었고 함께 근무하시는 선배 교수님들의 배려와 의국 전공의들의 도움으로

아주 행복한 대학병원 스태프 생활을 하게 되었다.

조교수로 진급한 지 얼마 안 되어 전혀 예상 못 한 일이 터졌다.

공무원이던 형을 불러내 함께 시작한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로 끝나고 부도 수표 위반으로 아버지나 형이 실형을 살아야 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도 형도 감옥에 보낼 수는 없어서 빚을 내가 떠안았다.

그런데 많지 않은 월급으로 빚을 갚다 보니 부부간의 불화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져 가고 있었다.

결국 영남지방에서 가장 월급을 많이 주는 병원의 신경정신과 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렇게 대학교수의 꿈은 조교수로 끝났다.

대신에 내 가정의 평화를 지키면서 아버지의 빚도 다 갚았다.

▶의사의 꽃

종합병원 신경정신과 과장 5년을 끝으로 봉직의 생활을 마감하고 1992년 2월에

의사의 꽃이라는 개업을 하게 되었다.

대출을 받아 개원하면서 우려했던 것은 기우였고 개원 첫 날부터 밀려드는 환자들로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던 중 2000년 5월부터 의약분업이 시작된다는 의료계의 위기가 찾아왔다.

정신과는 의약분업과는 직접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선배의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의사회 일에 뛰어들게 되었다.

울산광역시의사회 부회장이자 대한의사협회 중앙위원으로 울산과 서울을 밥 먹듯 오가면서 무려 44일간이나 병원 문을 닫고 의사 권리 쟁취와 의약분업 반대 운동을 하게 되었다.

그 사이 내 병원은 반 토막이 나고 내 건강 또한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다시 찾아온 병마

의사회 일과 개원의로서의 적지 않은 환자를 보느라고 불철주야 바쁜 생활을 보내던 중 2003년 사월 하순에 진료를 하다 갑자기 어지럼증이 오면서 잠시 의식을 잃어버리고 바지에 오줌을 싸는 일까지 생겼다.

(5월 14일 자 시니어문학상 면에는 논픽션 당선작 '늦깎이 인생' 6회가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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