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런 하숙집이라면 하룻밤 머무는 것만으로도 삶의 피로가 모두 씻길 것만 같다. tvN <스페인 하숙>은 이런 로망을 자극하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있는 알베르게(숙소)에서 그 곳을 찾는 순례자들에게 따뜻한 한 끼와 잠자리를 제공해주는 게 이 프로그램의 콘셉트. <삼시세끼> 어촌편으로 부부(?) 케미를 자랑했던 유해진, 차승원과 새 멤버로 배정남이 의기투합했다. 요리솜씨가 좋아 '차주부'로까지 불렸던 차승원이 알베르게의 메인 셰프로 '요리부'를 맡았고, 손재주가 좋아 뭐든 뚝딱 만들어내는 유해진은 이른바 '이케요(IKEYO)' 브랜드까지 세워 '설비부'를 맡았다. 배정남은 차승원의 밑에서 손발이 되어주는 보조였지만 자신만의 '리폼 능력'을 되살려 차승원과 유해진의 작업복을 만들어주는 '의상부'를 런칭(?)했다. 프로그램은 최근 이 곳을 많이 찾는 한국인 순례자들이 주요 대상이지만, 외국인 순례자들의 출연도 적지 않다. 함께 걷는 것만으로 금세 친구가 된다는 순례길이라는 공간 자체가 그러하듯이, 국적이나 언어 그리고 나이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실제로 저녁 시간에 한식을 앞에 두고 다양한 국적과 나이의 외국인들과 한국인이 어우러져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풍경은 전혀 부자연스러움이 없다.
언뜻 보면 나영석 사단의 전작들이었던 <삼시세끼>와 <윤식당>을 합쳐 놓은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올 법 하다. 실제로 차승원이 요리하고 유해진이 설비하는 그 풍경은 <삼시세끼>에서 익숙하게 봤던 것들이고, 두 사람이 마치 남편과 아내처럼 때론 툭탁대지만 척하면 착 알아 듣는 오랜 친분의 훈훈함 역시 그대로다. 여기에 외국인 순례자가 저녁에 한식을 먹으며 "맛있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은 <윤식당>의 풍경이 떠오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말하면 <스페인 하숙>은 이 두 프로그램들과 유사해보여도 완전히 다른 관전 포인트를 갖고 있다. 그것은 그 집을 찾는 손님들의 사연이나 리액션에 집중하기보다는, 손님들을 맞는 하숙집의 유해진, 차승원, 배정남의 그 준비과정에 더 집중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하고 불편한 게 없도록 집기를 수리하고 새로운 걸 만들어 놓는 그 마음을 시청자들과 공유하는 것. 손님이 한 명밖에 오지 않았어도 마치 임금님의 한 끼처럼 준비해 내놓는 그 마음이 주는 훈훈함과 뿌듯함이 시청자들이 이 프로그램을 보며 느끼는 기분 좋은 감정의 실체다. <스페인 하숙>은 최근 11.6%(닐슨 코리아)라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연전연승 나영석 사단 그 승승장구의 비밀
<스페인 하숙>을 보면 나영석 사단이 어떻게 그 많은 프로그램들을 연달아 성공시켰는가를 잘 알 수 있다. 최근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나온 KBS <1박2일>을 연출하다 지금은 tvN으로 이적한 유호진 PD는 새로운 프로그램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하며 나영석 PD를 만났던 사연을 털어놓은 바 있다. 유호진 PD는 완전히 새로운 도전을 하고픈 마음이 반이라고 했지만, 나영석 PD는 그에 대해 "네가 제일 잘 하는 게 뭔지 고민을 해보고 본인이 제일 잘 하는 것에 10%나 20%의 새로운 가능성을 덧붙이는 게 좋지 않겠니"라고 했다는 것. 이것은 나영석 사단이 <꽃보다 할배>를 시작으로 <삼시세끼>, <윤식당>, <알쓸신잡>, <신서유기> 그리고 <스페인 하숙>까지 연달아 성공을 거둔 중요한 요인이기도 하다. 나영석 PD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처음 KBS에서 tvN으로 왔을 때 유호진 PD처럼 무언가 완전히 새로운 걸 하고픈 욕망이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이 지금껏 해왔고 또 잘 할 수 있는 '여행'이라는 소재를 택했고, 그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들을 덧붙이는 것으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만들어냈던 것.
돌이켜 보면 <꽃보다 할배>에서 이서진이 "나도 요리할 수 있다"는 말 한 마디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 <삼시세끼>였고, 이것이 어촌편으로 스핀오프되면서 차승원과 유해진의 조합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부부 케미의 조합은 다시 <스페인 하숙>이라는 새로운 공간에 던져짐으로써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이야기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여행에 인문학을 더한 <알쓸신잡> 같은 콘셉트 역시 과거 <1박2일>에서 명사와 함께 하는 여행을 통해 시도됐던 것을 진화시켜 나온 프로그램이다. 특정 지역을 여행하고, 그 여행지에 담겨진 인문학적 이야기들을 저녁 식사자리에서 풀어놓는 방식은 우리에게 어렵게 여겨지던 인문학을 훨씬 쉽고 흥미롭게 전해주었다.
즉 나영석 사단의 성공 비결은 바로 그 익숙함과 새로움의 조화에 있다는 것이다. 이미 성공했던 코드나 소재들을 여전히 활용하지만, 거기에 새로운 시도들을 더함으로써 실패 확률을 줄이고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방식이다. 이는 대중적인 콘텐츠의 기본적인 성공 요건이기도 하다. 성공하는 콘텐츠는 기본적으로 보편성과 차별성을 잘 조화시키는데서 나오기 마련이다. 즉 보편적으로 공감할만할 정도로 익숙하면서도 어떤 콘텐츠와도 다른 차별점이 특별함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
◆개인이 아닌 사단이 갖는 다양성의 힘
하지만 여기서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건 나영석 PD 개인이 아니라 '사단'으로 불리는 이들의 집단 창작 시스템이다. 나영석 사단이 만든 프로그램의 엔딩 크레딧을 보면 PD와 작가 란에 여러 명의 이름들이 적혀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스페인 하숙>은 나영석 PD가 전면에 나서서 연출한 프로그램이지만, 엔딩크레딧에는 장은정, 박현용, 양슬기 PD가 들어있다. 지난해 방영됐던 <윤식당2> 스페인편의 경우, 나영석 PD와 함께 신효정, 장은정, 이진주, 양정우, 이지연, 정민경, 임경아, 양슬기, 박현용이 모두 들어가 있다. 아마도 이들이 모두 이 프로그램을 위해 스페인까지 날아가지는 않았을 테지만, 기획 단계에서의 회의 등을 통해서라도 이들은 함께 머리를 모은다. 그런 점에서 엔딩 크레딧에 모두 이름을 적어 두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집단 창작 시스템이 가져오는 효과다. 그것은 결국 보다 다양한 취향과 생각이 한 프로그램 안에 담길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준다. 한 사람이 만들면 그 한 사람의 취향과 생각 위주로 프로그램의 색깔이나 방향성이 그려지지만, 이처럼 여러 사람의 의견들이 반영된 프로그램은 보다 많은 이들의 취향과 생각을 공유하게 해준다. 결국 이 부분은 나영석 사단의 프로그램이 갖는 폭넓은 공감대를 가능하게 한다.
물론 이런 시스템이나 기획방식도 오래도록 반복되다 보면 한계를 드러낼 수 있다. 이를테면 최근 나영석 사단이 계속해서 만들어낸 여행과 먹방 소재에 대해 다소 '식상하다'는 이야기들이 조금씩 나오고 있는 문제가 그렇다. 제 아무리 많은 새로운 후배 PD들이 합류해 아이디어를 더하고는 있지만 워낙 나영석 PD 개인의 아우라가 커지면서 그 취향에 다소 편향되는 데서 생기는 문제들이다. 이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나영석 PD가 키워낸 후배 PD들이 이제는 저마다 자기 자리를 마련하고 제 색깔을 찾아가는 변화를 모색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스페인 하숙>은 이제 나영석 사단이라는 시스템에서 나온 성공작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간 많은 예능 프로그램들이 PD 개인의 역량에 의해 성패가 갈리곤 했지만, 이제 나영석 사단은 이를 시스템 안에 넣어 보다 안전한 성공률을 담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익숙함과 새로움, 보편성과 차별성을 조화시키는 그 집단 창작 시스템은 그래서 현재 많은 프로그램 제작자들이 추구하는 하나의 방향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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