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성리학 대학자 구미 인동 출신 여헌 장현광] <4>관직의 길 오르다

임진왜란 동안 전쟁의 아픔을 기록한 피란록과 피란후록 남겨

여헌 장현광 선생이 임진왜란 당시 청송군 부남면에 왔다가 절벽 위 3곳에 돌을 쌓았다는 여헌대. 여헌대 맞은편 200m 떨어진 곳에 병암서원이 있다.
여헌 장현광 선생이 임진왜란 당시 청송군 부남면에 왔다가 절벽 위 3곳에 돌을 쌓았다는 여헌대. 여헌대 맞은편 200m 떨어진 곳에 병암서원이 있다.
여헌 선생이 평소 즐겨 쓰고 다녔던 삿갓과 부채가 여헌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여헌 선생이 평소 즐겨 쓰고 다녔던 삿갓과 부채가 여헌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여헌 선생은 늦은 나이에 관직 길에 올랐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못해 오래 벼슬을 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여헌 선생은 목민관으로서 절도에 맞는 엄격한 생활로 청렴함을 잃지 않았다. 백성들이 해주는 비단옷 한 벌도 받지 않고 관직을 떠날 정도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여헌 선생은 임진왜란 동안 피란을 다니면서도 전쟁의 아픔을 소상히 기록해 '피란록'이란 책을 만들었다.

〈1〉 선생의 탄생과 인동 장씨
〈2〉 짧은 수학기, 드높은 학문적 지향
〈3〉 잇단 슬픔과 굴곡진 삶의 여정
〈4〉 관직의 길 오르다
〈5〉 학문 연구와 강학의 기틀 마련하다
〈6〉 강학 통해 문인 배출하다
〈7〉 서원과 향교의 재건, 그리고 선현추숭사업
〈8〉 인조반정과 산림으로의 징소
〈9〉 광대한 학문체계를 집대성하다
〈10〉 위대한 학자, 영원한 스승으로 기억되다

여헌 선생은 몹시 더운 여름철에는 어려운 경서 공부를 잠시 접어두고 가벼운 마음으로 옛글이나 시를 짓는 대회에 참가했다. 21세의 여헌 선생은 청도에서 열리는 하과에 참석했다.

시험 제목이 '구름 걷힌 푸른 하늘을 보다'인데 이는 공자의 수제자 안회가 세운 뜻이 맑고 상쾌한 푸른 하늘과 같다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여헌 선생은 "하늘을 보기만 하고 하늘에 이르지는 못했구나"라며 32세에 요절한 안회를 안타까워하는 글을 지었다. 시험 감독관들은 무릎을 '탁' 치면서 "이런 명구는 예사 선비로서는 할 수 없다"며 감탄해 높은 점수를 주었다.

선조 9년(1576) 조정에서는 각 고을에 재주와 행실이 뛰어난 젊은이를 추천하라고 했다. 23세의 여헌 선생이 인동 고을에서 추천됐다.

성주목사 허잠(許潛)이 어느 날, 한강 정구(鄭逑)에게 "남중에 호학(好學)하는 선비가 누구냐"고 물었다.

한강은 "공자의 삼천 명이나 되는 제자 중에도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이 안자 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쉽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모르기는 해도 장현광이 후일 우리의 사표(師表)가 될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그 예견은 빗나가지 않았다.

여헌 선생은 선조 14년(1581) 28세에 지방에서 실시하는 향시에 합격하고, 30세 봄에는 향시 별시에 합격했다.

그러나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이 없었고 오로지 학문 탐구에만 마음을 쏟았다.

서애 류성룡 선생은 초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던 여헌 선생을 보은현감(충청북도 보은군)으로 추천했다. 그의 나이 42세, 선조 28년(1595년)이다.

여헌 선생은 수령으로서 향약의 시행에 역점을 두었다. 억울한 백성이 없도록 했으며, 효도와 우애를 돈독히 하고 덕행을 존중하고 나쁜 풍속을 물리쳤다.

그러나 여헌 선생은 보은현감에 부임했지만, 오래 머물 생각이 아니었다. 현을 떠날 때 백성들이 길을 막고 더 머물기를 간청했지만, 이를 물리치고 떠났다.

백성들이 전별 선물로 여헌 선생 부인에게 비단옷을 한 벌 해주었지만, 여헌 선생은 아내의 비단옷을 바위에 걸어 두었다. 이 바위가 속칭 '속곳바위' 혹은 '치마바위'로 불리며 구전되고 있다.

당시 임진왜란으로 여러 고을의 수령들이 화를 피하기 위해 임지를 떠나는 사태가 빈번했다. 조정에서는 특별히 관직을 버리는 것을 금하는 법령을 엄격히 적용했다.

여헌 선생도 선산으로 돌아온 지 20일 만에 의금부로 압송됐다. 그렇지만 여헌의 생각을 전해 들은 선조는 여헌을 풀어주라고 명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여헌 선생은 임진왜란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했다. '피란록'(避亂錄·1592~1595)과 '피란후록'(避亂後錄·1595~1598)은 그렇게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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