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부처님오신날] 대구 달성군 비슬산 대견사

대구 달성군 유가읍 용리 비슬산 정상에 중창된 대견사. 대견사는 191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사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달성군 제공
대구 달성군 유가읍 용리 비슬산 정상에 중창된 대견사. 대견사는 191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사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달성군 제공

비슬산 대견사가 복원 및 중창된지 5년째를 맞고 있다. 대견사는 중창 이후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가피(加被)와 영험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일약 전국적인 기도 도량으로 부각되고 있다.

삼국유사의 일연 스님이 22년 동안 주석(駐錫·승려가 머무름)하고, 일제강점기에 강제 폐사된 비슬산 대견사는 지난 2014년 3월 중창됐다. 특히 대견사는 현재 전국 3천200여 곳의 폐사지 가운데 중창 제1호 사찰로 기록돼 의미를 더하고 있다.

대견사의 첫 이름은 보당암(寶幢庵)으로 불렸다. 보당암은 일연 스님이 22세 때 승과에 장원급제한 후 초임지로 주석한 곳이다.

지난 2012년 진행된 대견사 발굴조사에서 '辛亥五月◯'이라는 문자가 새겨진 암막새가 출토됐다. '辛亥'년의 간지에 해당하는 연도는 1371년(고려 공민왕 20년)과 1431년(조선 세종 13년)이다. 암막새의 평면형태 등을 보았을 때 고려말∼조선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미뤄볼 때 '辛亥'년은 1371년으로 대견사가 고려 공민왕 때 중수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조선 초기에 간행된 '동문선' 권111, 소에 실린 이첨의 글 '보당암중창법화삼매참소'를 통해 보당암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중창 추정시기는 1402년(태종 2년)이며 사찰 명칭 또한 대견사로 바뀐 것으로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도 대견사가 등장한다. 1416년(태종 16년) 2월 29일과 1423년(세종 5년) 11월 29일 이 절에 있던 장육관음상이 땀을 흘려 조정에 보고된 기록이 나온다. 이후 대견사는 1481년(성종 12년)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의 현풍현 불우조에 수록됐다. 특히 이 기록에는 '대견사는 남쪽 모퉁이에 있으며, 신라 헌덕왕 때 창건됐다'고 명시돼 있다.

지난 2002년 영남문화재연구원의 시굴조사 과정에서 추정 건물지 6동과 암·수막새 파편들이 확인됐다. 특히 출토된 암막새에서 '大見寺'의 명문이 나와 그동안 전설로만 전해오던 대견사의 정확한 명칭을 알게 됐다. 이때 수습된 기와 조각에 남아 있는 '만력 39년(1611년), 숭정 6년(1633년)' 등의 명문으로 봐 여러 차례 중수'중창 됐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대견사는 광해군과 인조대에 중창돼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사세(寺勢)를 유지하지 못했다.

1871년 편찬된 '현풍현읍지'에 "대견사는 비슬산 아래 있는데 지금은 폐허가 됐다. 신라 헌덕왕이 창건한 것으로 9층 석탑이 있다. 만력 임진년(1592년) 절이 기울고 무너졌다. 상량문 1책을 얻었는데 산세가 대마도를 끌어당기는 형세로 이절을 창건했다"고 수록돼 있다.

이후 대견사는 영친왕 즉위와 대한제국 축원을 위해 1900년 중수됐으며 영친왕이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난 뒤인 1908년 몰락했고 191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사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비슬산 대견사는 주지 법희스님이 한국불교계의 대표적 기도도량으로 기틀을 다져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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