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생의 탄생과 인동 장씨
〈2〉 짧은 수학기, 드높은 학문적 지향
〈3〉 잇단 슬픔과 굴곡진 삶의 여정
〈4〉 관직의 길 오르다
〈5〉 학문 연구와 강학의 기틀 마련하다
〈6〉 강학 통해 문인 배출하다
〈7〉 서원과 향교의 재건, 그리고 선현추숭사업
〈8〉 인조반정과 산림으로의 징소
〈9〉 광대한 학문체계를 집대성하다
〈10〉 위대한 학자, 영원한 스승으로 기억되다
전란이 수습됐지만,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구미 인동 남산의 옛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모두 불에 타 없어져 돌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구미 선산 누이의 아들인 노경임의 집으로 갔다.
선산은 조선 전역에서 인재가 가장 많이 나기로 정평이 난 곳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고 나와 있다.
이곳에서 여헌 선생은 주역을 비롯해 여러 경전을 거듭해 읽으면서 자신의 학문체계를 구체화했다.
또 자신을 찾아오는 젊은 선비들을 문하에 받아들여 강학에도 열중했다. 자연스럽게 선산 지역에서 자신의 학문의 뿌리를 내리게 됐다.
선조 35년(1602년) 12월 인동으로 돌아온 여헌 선생은 병세를 다스리며 학문과 강학에 힘을 쏟았다.
이듬해 조정에서는 여헌 선생에게 경북 의성 현령을 제수했다. 50세에 의성현령에 부임한 여헌 선생은 고을 안의 형편을 살폈다.
전란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논밭은 황폐했다. 백성들에게 논밭을 손질하게 하고 농사와 길쌈을 권장하며 안정된 삶을 이룰 수 있도록 했다.
보은현감으로 있을 때의 경험을 살려 목민관으로서의 책무를 다했다.
그러나 백성을 우선시하는 여헌 선생의 정사는 백성들에게는 환영받을 일이지만, 고을 이권을 독차지하고 있던 아전들에게는 눈엣가시였다.
향리 김건상은 여헌 선생을 쫓아 보내기 위해 계략을 꾸몄다. 어느 날 향교에 있던 대성(공자)의 위판과 술성공(자사)의 위판, 예국·낙국 두 정자의 위판 등이 사라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여헌 선생은 의성 현령에서 물러났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백성들은 의성향교에 청덕비를 세웠다.
청덕비 비문에는 '얼음보다 더 맑은 것은 없고/ 옥보다 거 결백한 것이 없는지라/ 아! 슬프다/ 우리 현령은 얼음같이 맑고 옥같이 결백하다'고 새겼다.
다시 선산으로 돌아온 여헌 선생을 위해 노경임은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굽어볼 수 있는 전망 좋은 선산읍 생곡리에 재실을 새롭게 지었다. 이 재실이 원회당이다.
여헌 선생의 학문적 명망이 알려지면서 선산과 인동을 넘어 영남 전역에서 원회당을 찾아오는 어린 학동들과 젊은 선비들이 줄을 이었다. 원회당은 주요 강학처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게 됐다.
1605년 가을, 경북 포항 입암의 정사진으로부터 새로운 거처가 마련됐다는 전갈을 받았다.
계곡물이 굽이쳐 흐르는 언덕 위에 작지만 아늑한 입암서원(포항시 북구 죽장면)이 마련된 것이다.
입암서원 일대에는 일제당과 만활당(萬活堂) 등이 있다. 이곳에서 여헌 선생은 본격적인 강학에 나섰다.
만활당은 1907년 포항 지역 의병 40여 명이 일시에 순국한 산남의진입암지변(山南義陣立巖之變)이 일어났을 때 일본군이 건물을 불태우려 하였으나 불이 붙지 않았다는 전설이 있다. 일제당 역시 여헌 선생의 강학처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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