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영재의 대구음악유사]그리운 코맹맹이 소리

권영재 전 대구적십자병원 원장

1960년대 초 서울로 수학여행 갔다. 보는 것마다 신기했다. 대구가 큰 도시인 줄 알았는데 서울 가보니 시골이었다. 레일을 다니는 전차도 신기했고, 고궁의 수려한 아름다움에 주눅 들고, 남녀가 손잡고 다니는 모습도 눈 설었다. 대구서는 부부라도 남정네가 혼자 앞장서 걸어가고 아낙은 몇 걸음 뒤를 따라가는 게 정석인데 거기서는 그랬다. 어둑해지면 학생들도 남녀가 찰싹 붙어 다녔다. 터키 '우스크달라'에 여행 온 이방인 느낌이었다.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도 전화를 걸 줄을 모른다. 다이얼식이었기 때문이다. 대구 전화는 전자식이라 손잡이를 한 참 돌려 교환수를 불러 통화할 번호를 대고 기다린다. 서울은 다이얼을 돌려 바로 상대방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완전히 서영춘 노래 '시골 영감 기차 타기'의 한 장면이다.

이 무렵 시골에서는 구장 집 전화 한 대 밖에 없었다. 누구네 집에 통화하고 싶다고 전화가 오면 구장은 마이크로 "청송 댁 전화왔니더."하고 외치면 당사자가 뛰어와 전화를 받곤 했다. 서울서 하숙할 때 우리 집에 전화하려면 우체국 가서 신청하고 최소한 한 시간은 기다려야 했다. 하숙 집 대문에는 '전화 있음'이라고 써 둔 집도 있었다. 요즘 같으면 '와이파이 됩니다'라는 의미와 같다. 그때는 전화가 개인 소유인 '백색 전화'와 우체국 소유인 '청색 전화'가 있었다. 나라가 가난하고 기술도 없어 이런 제도가 생긴 것이다. 백색 전화는 개인소유물이어서 마음대로 팔고 사고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전화 값이 싼 집값과 맞먹어 서민들은 청색전화를 들여다 놓을 수밖에 없었다. 돈이 있어 백색 전화를 신청해도 2,3년은 기다려야 했다.

전자식 전화는 교환수가 없으면 통화를 할 수가 없다. 송수화기를 든 다음 손잡이를 한참 돌리면 '교환'하는 매력적인 코맹맹이 소리가 들린다. 다음 원하는 곳의 전화번호를 말해주고 교환수가 연결시켜주면 둘 관계는 끝난다. 그러나 쉽게 볼일이 끝나지는 않는 경우가 많았다. 목적 외 통화가 잦았기 때문이다. 남녀유별이 심하던 시절이어서 여자 보기가 힘들었다. 적극적인 사람들은 교회에 가서 여자 구경을 하고 학생들은 영수학원가서 여학생자리를 힐끗힐끗 쳐다보다 온다. 소심한 사람들은 교환양들의 목소리 듣기를 했다. 전화기를 돌리면 은 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니 총각들은 시도 때도 없이 전화통을 붙잡았다. 대게는 지금 몇 시냐? 나이가 몇이냐? 고향이 어디냐? 묻는 정도였지만 어떤 강심장은 몇 번 수작을 벌리다가 데이트를 신청한다.

일반 시민들도 소방차 소리가 들리면 교환수에게 어디에 불났느냐고 묻는다. 길도 묻고, 내기한 일에 대한 심판 받으러 전화하기도 했다. 요즘으로 치면 인터넷 검색을 교환수를 통해서 한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돌 던지는 사람이야 재미로 하지만 얻어맞는 개구리는 목숨이 달렸다. 실제로 느끼는 감정과 다른 감정을 표현해야 할 때 발생하는 것이 '감정노동'이다. 판매, 유통, 음식, 관광, 간호 등 대인 서비스 노동에 주로 발생한다. 굴욕적인 말들 듣고도 먹고 살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포현하지 않는다. 그러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심한 좌절이나 분노, 적대감, 감정적 소진을 보이게 되면 심한 경우 정신질환이나 자살까지 갈 수가 있다.

당시는 전쟁을 겪은 뒤라 억센 인간들이 살던 때여서 별 일없이 넘어 갔지만 요즘이라면 노이로제 걸리거나 심지어 죽는 교환수도 많았지 싶다. 코맹맹이 교환수들, 할머니가 된 지금도 그 목소리가 나련가 궁금하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