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 시내는 6.25의 전화를 직접 당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대구 인근까지 포화가 날아드는 긴박한 전쟁상황 소식에 불안과 동요가 없기야 했을까. 날마다 불어나는 피난민들과 전상자들이 겪는 힘든 생활고는 목불인견이었을 것이다. 김우조 선생은 대부분 다른 화가들처럼 종군작가단에 가입했는데 그는 특히 피난민들의 행렬을 통해 6.25를 처절하게 기억하게 하는 인상적인 작품들을 여럿 남겼다.
작가는 부산으로 피난 내려간 가족들과 재회한 일화를 눈물겹게 회고한 바 있는데 그런 경험들을 포함해 뒷날 수차례 '1950년의 회상' 이란 제목으로 판화작품을 만들었다. 이 주제는 인물 군상으로 다루어진 점에서도 주목받는다. 특히 인상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1968년 작 '1950년대의 회상'은 그 결정판이라 할만하다. 폐허를 배경으로 봇짐을 싼 사람들이 배를 기다리는 듯한 광경인데 겨울 추위와 배고픔, 막연한 미래에 지친 처연함이 감도는 분위기를 굵고 단순한 선묘로 목판에 새겼다.
1980년대 오윤이나 이철수 등의 목판화 운동에 훨씬 앞서는 이 작품은 1960년대에 기적처럼 탄생한 우리미술의 한 걸작으로 보고 싶다. 일찍부터 한국화단의 주류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의미 있는 현실적 주제와 양식을 탐구하던 그의 작품들이 작년 대구문화예술회관의 한 기획전에서 대규모로 공개되어 지역에 큰 감동을 안겼다. 전 생애를 통해 거의 판화 장르에 집중해왔는데 가장 많은 부분이 목판화이고 그밖에 지(紙)판화와 말년의 모노타이프 같은 평판작업들까지 아우른다.
판화작업에 있어서 재료의 선택은 매우 중요하다. 재료의 특성은 바로 제작기법과 완성된 그림의 효과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기 때문이다. 김우조 선생의 경우 물감이 너무 귀해 대신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찾다 회화에서 판화로 관심을 돌렸다. 그래서 당시 주위에 흔한 송판과 베니어합판을 이용했는데 판목으로 쓰기엔 매우 거친 재료들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가난한 재료를 통해서' 역경의 시대를 더욱 상징적으로 암시하게 되었다. 마치 담뱃갑 속 은지에 그린 이중섭이나 하드보드 위에 많이 그렸던 초기의 박수근처럼. 다만 위의 목판화 경우는 예외적으로 대단히 야심적인 대작에 도전했다.
김우조 선생은 달성군 옥포면이 고향이다. 대구 계성중학교로 진학해 거기서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부임해온 서진달 작가를 만났다. 이 열정적인 화가로부터 미술을 배우며 큰 감화를 받았는데 일생 잊지 못했다. 뒷날 회고하기를 "나의 판화작업은 모두 독학이었다. 정말 힘든 작업이었고, 회화와 비교해 늘 소외되었지만 그래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판화의 스승인 '팔만대장경의 불화'와 조형의 기초를 가르쳐 주신 서진달 선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미술평론가〈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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