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병주교수의 역사와의 대화] 왕릉 답사의 즐거움

조선왕릉 40기 유네스코 세계유산
왕릉 조성은 후대 왕의 정치적 행위

조금만 바깥으로 나가면 초록빛의 수목이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하는 계절이다. 푸른 수목의 자태를 만끽하면서 역사와 문화의 향기까지 접할 수 있는 곳이 있다. 조선 왕과 왕비의 무덤인 왕릉이다. 왕릉 주변에는 금표를 설치하고, 나무도 베지 못하도록 했기에 울창한 산림이 보존될 수 있었다. 홍릉수목원이나 광릉수목원처럼 왕릉 주변에 수목원이 조성될 수 있었던 이유다.

2009년 6월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총 42기지만 태조 왕비 신의왕후의 제릉과 정종의 후릉은 북한에 있어 2기는 제외됐다. 조선의 왕은 27명이지만 왕비의 무덤이 왕의 무덤과 차이가 있는 경우 왕릉 숫자는 늘어난다. 예를 들어 중종의 무덤은 정릉(靖陵)이지만 첫째 왕비 단경왕후의 무덤은 온릉, 첫째 계비 장경왕후의 무덤은 희릉, 둘째 계비 문정왕후의 무덤은 태릉으로 총 네 기가 된다.

생전에 왕은 아니었지만 사후 익종으로 추숭된 효명세자도 수릉이라는 왕릉의 호칭을 얻었다. 연산군이나 광해군처럼 폐위된 왕의 무덤은 '묘'로 강등돼 왕릉에 포함되지 않는다. 단종은 폐위된 뒤 무덤도 노산군 묘로 강등되었지만 숙종 때 단종으로 복권되면서 장릉으로, 왕비 정순왕후(定順王后)의 무덤도 사릉으로 불리게 되었다.

왕릉 조성에는 묻히게 되는 왕이나 왕비보다 왕릉을 조성하는 후대 왕과 정치 세력의 입장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태조 계비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貞陵)의 경우 처음 조성될 때는 태조의 각별한 관심 속에 경복궁에서 바로 보이는 현재의 덕수궁 근처에 조성됐다. 그러나 태종은 계모의 무덤을 도성 밖으로 옮기게 했다. 현재 성북동에 있는 정릉이다. 지금도 덕수궁 일대를 '정동'(貞洞)이라 하는 것은 원래 정릉이 있었음을 기억시켜 주고 있다.

경기도 고양에 있는 서오릉(西五陵)을 대표하는 왕릉은 숙종의 명릉이다. 명릉에는 숙종과 첫째 계비 인현왕후가 쌍릉으로 모셔졌고 바로 옆에 10세 때 혼인한 조강지처 인경왕후의 익릉이 있다. 명릉의 좌측 언덕 위에는 둘째 계비 인원왕후의 무덤도 조성되어 있다. 숙종에게 사약을 받고 죽은 장희빈의 무덤도 1969년 경기도 광주 오포에 있던 것을 명릉 근처로 이장했다. 결과적으로 숙종은 재위 기간 함께했던 네 명의 왕비를 사후에도 곁에 두고 있다.

반면 중종은 생전에 세 명의 왕비가 있었지만 죽어서는 왕비 누구도 그의 곁에 없다. 중종의 정릉(靖陵)은 왕 홀로 묻힌 단릉(單陵)이다. 강남 빌딩 숲 한복판에 있다. 중종과 함께 묻히고자 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한 문정왕후의 태릉 곁으로는 아들 명종이 갔다. 명종의 무덤 강릉(康陵)에선 수렴청정을 받았던 생전처럼 사후에도 어머니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는 아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왕릉이 가장 많이 조성되어 있는 동구릉에는 태조의 건원릉, 선조의 목릉, 현종의 숭릉, 영조의 원릉 등이 조성되어 있는데 왕릉마다 사연을 가지고 있다. 영조는 50년을 함께 산 정성왕후가 먼저 승하하자 아버지 숙종의 명릉 주변에 홍릉을 조성하고 자신의 왕릉 터로 그 옆자리를 비워 놓았다.

그러나 영조가 83세로 승하했을 때 손자 정조는 선왕의 무덤을 동구릉 경역 내에 만들게 했다. 정작 영조의 옆자리는 영조가 66세에 맞았던 15세 왕비 정순왕후의 차지가 되었다. 영조의 원릉은 쌍릉으로 조성되어 사후에도 다정한 모습이지만 혼자가 된 정성왕후의 심정은 어떨까? 영조만 믿고 먼저 시아버지 곁으로 갔다가 오지 않는 남편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을까? 수목이 무성한 이 계절에 흥미로운 역사가 숨어 있는 조선왕릉을 찾아 몸과 마음을 풀어보기 바란다.

신병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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