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앞에서 주차 안내를 하던 교인이 길 가던 행인에게 폭력을 당해 치아 두 개가 부러지고 몸에 타박상을 입은 사건이 있었다. 둘은 서로 모르는 관계였고, 뚜렷한 폭력의 이유는 없었다. 가해자는 이웃 아파트 주민이었다. 나는 염려가 되었다. '그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우리 사회의 시한폭탄이다. 아파트 주민들은 이 사람의 위험성을 알기나 할까?' 그러자 마산의 아파트 방화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너무나 끔찍한 사건이었다. 기자의 질문에 그는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서 분하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엉뚱한 말인가? 아니다. 그의 내면에서는 연관성이 있다. 자신의 쌓인 분노를 불특정 다수에게 표출한 것이다.
우리 사회는 분노를 키워가는 사회다. 분노를 해소할 메커니즘이 없다. 언제 북에서 날아올지 모르는 김정은의 핵폭탄보다 우리의 눈앞에서 무수한 분노의 폭탄들이 먼저 터질까 걱정이다.
우리 사회의 분노 지수는 매우 높다. 서유럽의 국가들과 비교하여 3배 이상이라는 통계가 있다. 그것의 집단적인 원인으로는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사회 구성원들의 냉담, 무관심, 방치 등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큰 사고로 희생자가 발생했는데 책임 회피적인 관료주의, 정치가들의 정치적 이용, 법률적인 입증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무력감, 절망감, 좌절감을 느낀다. 사랑하는 가족이 죽었는데 원인을 밝히지 못하고 사회적 위로자도 없고 정치 지도자들의 행동 속에서 진정성을 찾기 어려울 때 좌절한다.
"운이 나빴군요. 사고네요." 이렇게 회피한다. "사정은 딱한데 내 업무가 아니라서 어떻게 할 수가 없네요." 이런 말을 들으면 사방에 팔레스타인 장벽 같은 벽이 탁탁 올라오는 느낌이다. 그 벽 안에 고립된다. 이때가 가장 절망스러운 순간이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아무런 보호나 위로, 보상도 받지 못하면 마음에 쌓인 원망, 억울함, 분노가 평생 얼마나 깊이 쌓이겠는가? 또 "보상 받았잖아요? 돈을 더 달라고요? 자식 죽은 것이 벼슬입니까? 언제까지 계속 우려 먹을 건가요?" 이런 말까지 나오면 피해자들이 느끼는 절망감은 말 그대로 죽음에 이르게 된다. 분노가 부풀어 올라서 폭발하기 직전이다.
세월호 시위 현장에서 사망자 가족들을 빨갱이라 하고 단식 현장에서 음식을 먹은 어버이연합집회에 참여한 노인에 게 "어르신 힘드시죠? 어디서 오셨어요?" 하면서 말을 붙여보니 정치와 상관없는 힘든 삶을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노인이었다. 왜 그는 그 자리에 나왔나? 그 역시 마음속에 쌓인 분노의 표현이었다. 세월호 유가족도 어버이연합도 모두가 분노와 우울의 표현이다.
우리 사회에 걸어다니는 분노의 폭탄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 분노의 폭탄이 우리 아파트 같은 동에, 우리 아랫집에 살고 있다. 아니 바로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 이웃을 바라보는 시각, 이웃과 관계를 맺는 방법을 반성해보자. 슬픔을 당한 사람을 위로하는 정치인의 정중한 태도는 그 사회의 상징적 행위다. "이런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 내가 앞장서 해결해 보겠습니다" 하는 한마디를 듣고 싶다. 아무리 무능하고, 절망이 깊고, 분노가 터질듯 쌓여도 그 마음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치유된다.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있으며,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줄 사람이 있으 면, 함께 울어줄 사람만 있어도, 공감해 주고 같은 편에 서는 사람만 있어도 회복된다. 사람은 그 누구도 사랑받으면 치유된다.

대구중앙교회대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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